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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6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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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5-05-27 조회수48 추천수3 반대(0) 신고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요한 16,5-11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타이타닉]을 보면 사목자의 소명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암초에 부딪혀 크게 손상된 [타이타닉호]가 바다 속으로 침몰해가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승객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비규환의 상태가 됩니다. 특히 배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구명보트가 있는 곳은 어떻게든 그 배에 타기 위해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자칫 구명보트가 뒤집히거나 혹은 제대로 사람이 타지도 못한 채 구명보트를 잃을 수 있는 위기에 빠지지요. 그 때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관현악단 단원들이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가톨릭 성가 "주여 임하소서"를 연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연주를 듣고 마음을 진정시킨 사람들은 질서정연하게 움직여 최대한 많은 사람이 배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그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던 사람들은 구명보트에 타지 못하고 [타이타닉호]와 함께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앞으로 겪어내셔야 할 고통과 시련, 죽음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건너가게 될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에 걸쳐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것은, 어쩌면 [타이타닉호]에 탔던 관현악단 단원들이 배가 침몰하는 순간에 사람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했던 것과 같은 이유, 같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갑작스레 스승을 잃은 제자들이 죽음의 공포에 빠져 우왕좌왕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일이 없도록 그들을 진정시키는 것이 첫번째 이유이자 목적이고,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가 그 상황을 잘 이겨내도록 힘을 주시리라는 것을 제자들이 알도록 하는 것이 두번째 이유이자 목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주님께서 보내신 '보호자' 성령과 함께 이 모든 고통과 시련의 과정을 극복해냄으로써 '죄', '의로움', '심판'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점들을 바로잡아 제대로 알게 될 것입니다.

 

'죄'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우리는 '죄'라고 하면 그로 인한 책임과 벌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고 있는 그 시간에도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은총을 베풀어 주시며, 우리가 당신께로 되돌아가면 언제든 안아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다고 해서 '하느님께 벌을 받으면 어쩌나'하는 생각에 겁을 집어먹고 그분에게서 멀어져서는 안됩니다. 그럴수록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그분 앞에서 나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뉘우치며 그 죄를 극복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심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지 하느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의로움'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을 어기지 않음으로써 그분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요. 하지만 단순히 십계명을 "어기지 않는 것" 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한없이 부족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망설이고 주저하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께서 떠나시게 되면 그 때에는 후회해도 이미 늦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판'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우리는 '심판'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세계의 '종말'을 소재로 하는 재난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곤 합니다.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지고, 그로 인해 발생한 해일이 마을을 덮쳐 수만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등 물리적인 피해가 생기면 그것을 주님의 '심판'이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단순무식한 방법으로 우리가 지은 죄값을 치르게 하시는 무자비한 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심판은 우리가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언제든 그 심판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삶 속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만 채우려드는 '세상의 우두머리'들이 떵떵거리고 잘 사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저런 불의한 이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더 잘 먹고 잘 살도록 내버려두시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에서,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일에서 기쁨과 의미를 찾지 못하고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그들에게는 이미 '심판'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면 하느님 앞에서 영원의 시간을 보내게 될텐데, 그들에게는 그 시간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가시방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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