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간절히 원하던 일이었기 때문에 크게 기뻐한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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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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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5-31 | 조회수24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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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마리아는 석 달 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39-56).”
1)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일을, 우리 교회가 축일로 정해서 기념하는 것은, 두 어머니의 만남이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성모님께 전해 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은, 성모님 혼자서 들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그 소식을 엘리사벳에게 다시 전해 주셨습니다. 복음서에 있는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엘리사벳에게만 전해 준 것처럼 보이지만, 즈카르야가 옆에 있었을 것이고, 이웃과 친척들도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면 엘리사벳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이 엘리사벳에게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복음’을) 전해 준 일은, 사실상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한 일과 같고, 성모님은 ‘기쁜 소식의 첫 선포자’가 되셨습니다. <‘첫 선교사’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성모님의 잉태가 ‘성령 잉태’ 라는 것을 확인해 준 중요한 증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내 주님’이라고 부른, 즉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첫 신앙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두 어머니의 만남은, 사적인 만남이 아니라 공적인 만남입니다.> 이 모든 점을 다 합해서 생각하면, 성모님과 엘리사벳의 만남은 구원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2) ‘마리아의 노래’는, 메시아를 보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찬미가이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을 기뻐하는 ‘기쁨의 노래’입니다. 이 기쁨의 이유는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간절하게 원하던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구원받기를 간절하게 원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메시아 강생 소식’은 ‘기쁜 소식’이 아니고, 자기하고는 상관이 없는 ‘남의 일’입니다. 마태오복음에 있는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보면 사람들의 그런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마태 2,1-3).” 여기서 ‘깜짝 놀랐다.’ 라는 말은 갑자기 일어난 일에 대해서 놀랐다는 뜻일 뿐이고, 기뻐했다는 뜻은 없습니다. 그 이야기에서, ‘기뻐한 사람들’은 동방박사들뿐입니다.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사제들과 율법학자들 가운데에는 동방박사들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간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기뻐하지도 않고, 메시아 탄생 소식을 듣고도 움직이지도 않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메시아 강생을 간절하게 원하고 기다렸다는 것은 모두 ‘위선’입니다.
3) ‘마리아의 노래’를 표현만 보면, 하느님께서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은 버리시고, ‘비천한 이들, 굶주린 이들’만 구원하시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마태 18,14). 따라서 하느님의 구원에서 배제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들’은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려고 노력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통치자들’은 힘으로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짓을 멈추고 진심으로 ‘낮춤’과 ‘섬김’을 실행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부유한 자들’은 재물을 섬기는 짓을 멈추고 하느님만 섬기는 사람으로 변화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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