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주님의 큰 사랑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회개가 시작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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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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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6-06 | 조회수144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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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1,15-19).”
1) 베드로 사도는, 얼떨결에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요한 18,15-27), 곧바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크게 통회했습니다(루카 22,62).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바로 잘못을 고백하면서 용서를 청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잘못을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고해성사’의 순서를 보면, ‘보속’은 고해성사를 본 다음에, 즉 용서를 받은 다음에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 물으시고,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고 세 번 말씀하신 것은, 그에게 ‘보속’을 주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는 것이 그가 실행해야 할 보속입니다.>
2) 그런데 ‘보속’이라는 말을 ‘죗값’으로, 또는 ‘죄에 대한 벌’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보속’이 ‘죄에 대한 벌’의 성격을 띠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양들을 돌보는 일을 베드로 사도에게 맡기신 것은, 당신을 대리하는 목자 직무를 맡기신 것인데, 그 일이 ‘벌’이라면, 그것은 많이 이상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또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는 일을 ‘벌’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 이상한 일입니다. <‘사랑’이 ‘벌’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경우에는, ‘보속’을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 ‘치유 과정’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죄는 영혼의 병이고, 회개와 고백과 용서와 보속은 모두 그 병을 치유하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는 병에 걸렸다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넘어져서 다쳤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데,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는 일은, 그 자신이 넘어져서 생긴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 됩니다. <우리에게도 ‘보속’은 치유 과정이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벌’의 성격을 띨 수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보속’은 주님께서 주신 ‘용서의 은총’에 감사드리는 일이고, 주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그 용서와 감사와 사랑과 응답이 모두 합해져서 ‘치유의 은총’이 됩니다.>
3) 연옥 영혼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보속’과 ‘벌’을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옥은 ‘벌’을 받는 지옥과는 완전히 다른 곳, ‘보속’을 행하면서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곳입니다. <죽은 다음에 새로 부과된 보속이 아니라, 살아서 다 행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보속입니다.> 주님의 ‘용서의 은총’은 이미 주어져 있고, 실행해야 할 보속은 아직 남아 있는 상태가 연옥입니다. 연옥도 대단히 고통스러운 곳이라고 전해지긴 하지만, 그 고통은 ‘벌’을 받는 고통이 아니라,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는 과정에서, 또 병들고 다친 영혼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이기 때문에 지옥의 고통과는 다릅니다.
4)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도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1요한 4,10).> 그래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은,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도 아니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강요하는 말씀도 아니고, 당신이 제자들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다시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주님의 큰 사랑’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벌 받는 것이 무서워서 하는 회개는 억지로 하는 일이고, 그것은 많이 부족한 회개, 진정성 없는 회개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여라.”가 아니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고 말씀하셨다는 점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실현됩니다. 우리가 만일에 ‘예수님만’ 사랑하고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부활 제7주간 금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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