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령 강림 대축일 다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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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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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6-08 | 조회수136 | 추천수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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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강림 대축일 다해] 요한 20,19-23 "성령을 받아라."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제자들을 떠나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제자들이 그 성령의 인도에 따라 주님 뜻을 충실히 따르며 살아감으로써 ‘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가 시작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각각의 사람 안에서, 또한 그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십니다. 첫째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어 우리가 그 사랑을 깊이 느끼며 삶의 참된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둘째, 우리를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하십니다. 즉 우리가 벌 받을까봐 두려워서, 마지못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소극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노력하는 적극적인 모습으로 변화되게 하십니다. 셋째, 죄를 지어 죽음과 같은 짙은 어둠 속을 방황하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회개하도록 이끄시어 하느님께 받은 생명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넷째,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를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 안으로 초대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여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성령의 활동은 무엇을 위해 이루어질까요?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을 보면 그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에 사도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있을 때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불꽃 모양으로 내려오셨고, 그러자 그들은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대로 다양한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세상의 다양한 언어로 하느님의 위업을 찬양하는 내용을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구약시대의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 인간의 언어가 여러개로 나뉘어짐으로써 마음과 뜻이 분열되었었는데, 성령의 활동을 통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소통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이렇듯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민족이 달라도 서로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념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세대가 달라도 서로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쉴 틈 없이 계속되는 갈등과 분란, 전쟁과 폭력을 멈추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평화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지요. 그것이 성령께서 지향하시는 바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신앙생활과 삶은 ‘성령에 힘입어’, 즉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에 따름으로써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분 뜻에 철저히 순명하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성령에 힘 입은 삶을 사셨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어머니 태중에 잉태되셨고, 요르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는 성령을 맞아들이셨습니다. 그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게 하셨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공생활 전체도 성령의 인도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나자렛 회당에서 사람들을 처음으로 가르치실 때 ‘주님의 영’이 당신에게 내려오셨음을, 앞으로 당신께서 하시게 될 모든 일이 그 성령과 함께 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또한 성령의 힘과 능력으로 병든 이들을 치유하시고,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이들을 풀어주셨습니다. 또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면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 새로 태어나겠다는 각오로 철저히 그분 뜻에 따라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성령의 이끄심에 충실히 따라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숨을 불어넣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원문은 ‘숨을 건네주다’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당신께서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 자체를 다시 말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당신 생명을 우리에게 기꺼이 내어주신 겁니다. 그 숭고한 희생을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다시 태어나 참된 생명을 누리게 하시지요.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불어 넣어주신 생명의 숨이 헛되이 흩어지지 않도록 성령을 내 안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현존하시면서 나의 행동과 삶을 통해 활동하시게 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다가오십니다. 때로는 ‘불’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일으키는 뜨거운 사랑의 불길은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이고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태워버림으로써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셨을 때의 그 완전하고 선한 모습으로 되돌려 줍니다. 또한 성령께서 비춰주시는 진리의 불빛은 나로하여금 무엇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를 올바르게 식별하며 그분 뜻에 비추어 내 삶을 성찰함으로써 잘못을 발견하고 바로잡도록 이끌어 주지요. 때로는 ‘바람’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매서운 강풍으로 내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걱정과 근심, 헛된 욕망을 몰아내시기도 하고, 부드러운 미풍으로 실패와 좌절, 슬픔과 상처로 괴로워하는 나를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시기도 합니다. 이런 성령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따름으로써, 우리는 주님께서 건네주신 참된 생명을 영원토록 간직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주님과 하나의 숨을, 같은 생명을 공유하는 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같은 아버지로 모시는 ‘한 형제’가 됩니다. 이 세상에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 자매들이 주님께서 보내주신 같은 성령을 받아들여 그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나와 한 몸인 그들이 죄악의 고통과 어둠 속에서 병들어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되겠지요. 내 몸 어딘가에 생긴 병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병세가 점점 더 깊어지다가 결국 몸 전체가 죽음에 이르게 될테니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 형제 자매를 용서함으로써 그들을 죄악의 고통과 어둠 속에서 구해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포용하고 사랑하면 그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지체가 충만한 은총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참된 평화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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