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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양승국 신부님_ 오늘 우리는 지금 어디에 미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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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5-06-12 조회수196 추천수4 반대(0) 신고

 

교회 역사 안에서 물건이나 외모, 옷차림에 신경 쓰지 않기로 가장 유명한 분이 아르스의 비안네 신부님입니다. 그분의 사제관은 아무것도 없이 너무 황량해서 마치 유령의 집과도 같았답니다.

신부님은 단 한 벌 밖에 없는 수단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습니다. 워낙 전반적으로 너덜거렸기에 수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구두는 한 번도 약칠을 하거나 솔을 댄 적이 없이 그냥 되는 대로 신었습니다. 보기 흉한 모자, 시골스런 외모...누가 보아도 노숙인으로 밖에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비안네 신부님을 두고 동료 사제들이 화가 나서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도대체 비안네 신부는 우리 사제단 모두를 욕 먹일 작정인가? 검소한 것도 정도가 있지. 남부끄러워 같이 있을 수가 없구먼!”

이런 면에서 돈보스코도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남겨진 돈보스코의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살펴보면 외모에 신경을 쓴 흔적이 조금도 없습니다. 헤어스타일도 자연 그대로입니다. 얼굴은 상습 과로로 항상 퀭했습니다. 인화된 돈보스코의 사진들 가운데 어떤 사진들은 너무 없어보인 나머지 비서단에서 공개하지 않기고 결정했습니다.

이분들이 왜 그렇게 사셨을까 묵상해봅니다. 이분들은 하루 많은 시간을 고해소 안에서 보냈습니다. 사제로서 고해소에만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남은 시간을 쪼개 미사도 봉헌해야 했습니다. 강론준비도 해야 했습니다. 잠도 자야했습니다.

이분들은 외모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쓰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목에 전념하느라, 영혼 구원에 전념하느라, 자신의 외모에 신경 쓸 시간이 도무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다 상위에 가치를 선택하고 집중하느라 다른 부차적인 가치들을 뒤로 미룬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선택과 집중을 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그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 9-10)

이것 저것 물건들에 신경쓰지 말고 보다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가치, 곧 복음 선포에 우선권을 두고 집중하고 헌신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돈보스코 생애 내내 부르짖었던 삶의 모토가 있습니다. 라틴어로 이렇습니다.

“Da mihi animas, cetera tolle”

우리 말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나에게 영혼을 주십시오. 나머지는 다 가져가십시오.”

돈보스코가 영혼 구원에 얼마나 우선권을 두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돈보스코의 애제자로 스승과 같이 성인 반열에 오른 도미니코 사비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영혼 구원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모릅니다.

초창기 돈보스코 오라토리오 안에 살았던 청소년들 사이에 전해오던 전통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버지 돈보스코의 영명 축일 날 청소년들이 작은 쪽지에다가 자신이 원하는 선물 내역을 적어내면 그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전통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가 쪽지에 적은 내용은 이랬습니다.

“제 영혼을 구해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성인(聖人)이 되게 해주십시오.”

성인들의 영성생활 안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선택과 집중, 그리고 본질에 대한 충실성입니다. 그들은 사목자로서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가지치기를 단행했습니다. 그리고는 오직 영적인 것, 하느님, 신자들의 영성 생활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습니다.

오늘 과연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어디에 우리 삶의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지금 어디에 미쳐 있습니까? 오늘 우리 내면에도 복음 선포와 이웃의 영혼 구원을 위한 간한 열정, 그런 헌신이 다시금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2025년 6월 12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_조명연 신부님

 

 

넓은 운동장에 어떤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복장이 눈에 확 띕니다. 그 운동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무릎까지 올라오는 검은 양말을 신고 있고, 호루라기를 불면서 운동장을 걷기도 하고 또 뛰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뛰고 있으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기도 하고 뒷걸음칠 때도 있습니다. 이 사람은 때론 자기 셔츠 주머니에 손을 넣어 카드를 공중에 내밀기도 합니다.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까?

 

눈치채신 분도 계시겠지만, 이 사람은 축구 심판이었습니다. 예전에 축구 경기 구경을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 축구 심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축구 선수들을 모두 제외하고 축구 심판만을 보니 그 모습이 너무 재미있는 것입니다.

 

좁은 시야로 보면, 세상은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넓은 시야로 보면, 그 이상함도 괜찮아집니다. 축구 시합에서 축구 심판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 시야가 바로 주님의 시선이었습니다. 그 시선은 철저하게 사랑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사랑을 통해서만 주님의 일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인간관계 그리고 세상의 일 모두 주님 뜻과 그분의 시선 안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열린 시야, 넓은 시야를 통해서만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있으며, 그 안에 커다란 기쁨과 희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조금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그 당시의 사람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하늘 나라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셨다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으며,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 말씀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닮을 수는 있어도 능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좁은 시야로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사랑의 넓은 시야로 바꿔주십니다. 단순히 율법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정신을 기억하면서 철저하게 사랑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에게 ‘바보, 멍청이’라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되었고, 다툰 형제가 있으면 얼른 화해하고서 예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분쟁이 있을 때 얼른 타협하라고 하십니다.

 

이 모두가 사랑의 넓은 시야를 가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좁은 시야를 가지고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랑의 넓은 시야가 분명 필요합니다.

 

 

오늘의 명언: 삶의 목적은 목적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로빈 샤르마).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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