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위선’ 자체도 ‘큰 죄’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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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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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6-12 | 조회수159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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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26).”
1) ‘위선’은, 속마음을 감추고 겉으로만 잘하는 척 하는 ‘거짓 언행’입니다. 그래서 위선 자체도 죄가 됩니다.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하느님도 속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이라는 말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거짓 의로움’, 즉 ‘위선’을 뜻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위선자로 살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이고, “너희는 위선자로 살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신앙인들이 실행해야 할 의로움의 기준점으로 삼아서 그들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들처럼 살지 말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2) 위선자들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십계명 제5계명을 잘 지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주는 ‘분노’와 ‘모욕’도 제5계명 위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정신적인 살인도 살인죄라는 가르침입니다.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것도 제5계명 위반인데, 그런 증오심은 자기 자신의 영혼도 죽게 만듭니다.>
3) 그런데 ‘바보’ 라는 말에서, 바오로 사도가 우상숭배자들을 ‘바보’로 표현한 말이 연상됩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로마 1,20-22).” 이 말은, 분명히 우상숭배자들을 ‘바보’ 라고 부른 말이지만,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고,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른 것은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른 일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7-8)”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가운데에는 이 말을 듣고 ‘모욕감’을 느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그들의 위선을 꾸짖고,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라고 가르치는 말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한 말인지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좋은 의도라면 아무 말이나 막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막말’을 해서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주었으면서도 ‘좋은 의도’로 한 말이라고 주장하는 경우에, 그 주장이 ‘위선’일 때가 많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로 죄짓지 않도록 하라고 충고합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야고 3,9-10).”>
4) 23절-24절의 말씀은, ‘나 때문에’ 상처를 입고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가서’ 그 형제에게 용서를 청하고 화해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하여라.” 라고 가르치신 일이 많은데, 여기서는 “용서하여라.”가 아니라, “용서를 청하여라.”입니다. “나는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일은 있어도 사람에게 용서를 청할 일은 없다.” 라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25절-26절의 말씀은, 회개와 보속은 철저하게, 또 완전하게 실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다.” 라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와 보속을 판단하는 것은 주님만의 권한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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