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삼위일체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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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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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6-15 | 조회수186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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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12-15).”
1)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0-21ㄴ).”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6).” 신앙생활의 목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일치와 사랑과 영광에 참여하는 것인데, 그 참여가 곧 ‘구원’이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이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2) ‘삼위일체 대축일’ 미사에서 바치는 감사송에 ‘삼위일체 교리’가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한 위격이 아니라 한 본체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시옵니다. 주님의 계시로 저희가 믿는 주님의 영광은, 아드님께도 성령께도 다름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요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며, 위엄으로는 같으심을 흠숭하오며, 영원하신 참하느님을 믿어 고백하나이다.” 여기에 나오는 위격, 본체, 본성 등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아니고, 특히 ‘위격’은 삼위일체 교리에서만 사용하는 특별한 용어이기 때문에, 감사송이 마치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말’로 보이기도 하고, 인간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공허하고 관념적인 말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좀 더 쉬운 용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나 알아듣는 쉬운 말로 바꿀 수도 없습니다. 어떻든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이기 때문에, 쉬운 말로 ‘설명’하려고 애쓰고 시도하다가 삼위일체 교리를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도 하고,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3)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신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2-16).”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라는 말은, “하느님에 대해서(또는 하느님의 신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는’ 없었다는 말은, ‘앞으로는’ 있을 것이라는 말인데,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하느님의 신비에 대해서) 온전히 알게 되는 때는 바로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입니다(묵시 22,4).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를, “삼위일체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입니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사랑은, 모든 사랑의 원형이고, 원천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보내 주신 일도 ‘사랑’이고, 성령을 내려 주신 일도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랑은, 분명히 셋으로 구분되지만, 하나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믿는 것이 신앙이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르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은 삼위일체의 사랑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4)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또는 삼위일체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랑을 묵상만 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방법은 이웃 사랑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ㄴ-21).” <누군가가 “삼위일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교리서에 있는 대로 대답하면 되고, 또 “왜 삼위일체이어야 하는가?” 라고 물으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가 답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삼위가 일체인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라고 물으면 대답은 “모른다.”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삼위일체 대축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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