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인간, 삼위일체 하느님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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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선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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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6-15 | 조회수219 | 추천수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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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15.주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잠언8,22-31 로마5,1-5 요한16,12-15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인간,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상”
세상 언제 어디서나 바칠수 있는 영원히 가장 짧고 좋은 기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계 어느 종교에도 이런 좋은 기도는 없습니다. 하느님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바로 <가톨릭 기도서> 맨처음에 나오는 십자성호를 그으며 바치는 삼위일체 고백의 성호경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호경의 은총이 참으로 큽니다. 나 더하기(+) 하느님해야 비로소 충만한 참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 빼기(-) 하느님은 제로라는, 내 인생 아무것도 아닌, 허무라는 이야기입니다. 성호경 기도로 삼위일체 하느님은 나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고 내 존재 깊이 각인되는 인호가 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고백이 전례문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미사시 성호경에 이은 인사도 삼위일체 하느님 고백입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방금 흥겹게 부른 화답송 후렴도 온누리에 충만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고백입니다.
“주의 이름 온 세상에 그 얼마나 묘하신고.”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6월 예수성심 성월 연중시기가 시작되며 맞이하는 대축일이 참 고맙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삼위일체에 근거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신비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입니다. 하느님 자신이 내적신비이므로, 다른 모든 신앙의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입니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의 삼위일체 신앙고백도 감동적입니다.
“모든 것에 앞서 이 훌륭한 유산을 간직하십시오. 이를 위하여 나는 살아 싸우고 있으며, 이 유산과 더불어 죽기를 원합니다. 이 선물은 나에게 모든 악을 견디고 모든 즐거움을 하찮게 여기게 합니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자신을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자기를 활짝 개방하십니다. 성자를 통하여 알려지신 성부요, 성령을 통하여 계시되는 성부와 성자입니다. 그러니 삼위일체 교리는 화석화된 교리가 아니라 체험에 바탕을 둔 살아 있는 사랑의 교리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너나할 것없이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 인간입니다. 인간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숨쉬며 움직이며 살아가니 이렇게 살아있다는 자체가 하느님 체험이자 증거입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권고가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그 무엇에도 너 흔들리지 말며 그 무엇에도 너 두려워하지 마라.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 하느님께서만 변치 않으신다.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가진 자는 부족함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바로 이런 권고를 확실한 믿음으로 바꿔주는 것이 십자성호를 그으며 바치는 성호경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그대가 사랑을 본다면 그대는 바로 삼위일체를 뵙는 것이다.”말합니다. 그러니 사랑할수록 삼위일체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사랑의 답입니다. 그러니 공부중의 평생공부가 삼위일체 하느님 공부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대작 1333쪽 끝부분에 나오는 성인의 겸손한 기도가 감동적입니다.
“주 나의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습니다. 주 나의 하느님, 내 유일한 희망이시여, 빌건데 내가 기진하여 당신을 탐구하기 싫어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항상 열렬히 당신 얼굴을 찾게 해 주십시오. 당신을 기억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을 이해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을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오로지 당신 말씀을 설교하고 당신을 찬미해서만 말을 하기가 소원입니다. 내 하느님, 수다스러움에서 나를 구해 주십시오. 내 영혼 저 속 깊이에서 이 병을 앓고 있으며 당신 면전에서 너무도 가련하여 당신의 자비로 피난하는 내 영혼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궁극의 답은 삼위일체 하느님입니다. 사랑은 개방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눈높이에 맞추어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자신을 활짝 개방하시어 당신을 찾는 누구나 만나 주시고 생명과 사랑을 주시어 살게 하시니 바로 제1독서 잠언이 소개하는 주님의 사랑받는 아이는 예수님이자 성령이요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나는 그분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 나는 날마다 그분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 나는 그분께서 지으신 땅 위에서 뛰놀며,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바로 이렇게 하느님의 어린이가 되어 지상천국의 삶을 살게 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우리의 모상이자 참된 공동체의 원형이기도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일치의 하느님 공동체가 참 고마운 신비입니다. 참으로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사랑으로 깊이 투신하면 할수록 삼위일체 공동체 하느님을 체험할 것입니다.
반대로 삼위일체 하느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내 몸담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와의 일치도 깊어질 것입니다. 단언컨대 사랑의 공동체 삶 없이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체험하고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들을 보세요! 삼위일체 하느님은 구별될뿐, 분리됨이 없이 절묘하게 협력하여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그 빛나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내며 이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문득 ‘우리(牛利)’라는 어느 자매 이름이 생각납니다. 소처럼 이로운 사람! 바로 바로 사랑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하루하루 쌓여온 습관들이 내일을 결정하는 운명이 됩니다. 굳어지 습관은 갑옷이 될 수도 있고, 벽이 될 수도 있습니다’<다산>. 끊임없이 성호경 기도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하며 그 사랑의 신비를 실천한 습관은 영적 갑옷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좋은 덕의 선택과 훈련을 통한 습관화가 영성생활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예수님 말씀에서도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깊은 연관과 일치를 봅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에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 바로 하느님을 닮아가는 여정입니다. 바로 진리를 깨달아 가는 깨달음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성령이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공적 예닮의 여정과 더불어 삼위일체 하느님과 사랑의 친교를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성삼의 복자 엘리사벳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오, 흠숭하올 삼위일체 하느님, 제가 흔들림없이 평온하게 당신 안에 머물도록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무엇도 저의 평화를 뒤흔들거나, 제가 당신을 떠나지 못하게 하시고, 오히려 순간마다 당신의 심오한 신비로 더 깊이 데려가 주소서. 오, 나의 변치 않는 분이시여! 제 영혼을 평화롭게 하소서.”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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