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영근 신부님_“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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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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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6-22 | 조회수96 | 추천수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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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말씀(6/22) :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 제1독서 : 창세 14, 18-20 제2독서 : 1코린 11, 23-26 * 복음 : 루카 9, 11ㄴ-17
11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12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13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사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15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16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 <오늘의 강론>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성사의 신비를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신학대전 3권). “지극히 거룩한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내포되어 있다. 즉 우리의 파스카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빵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그 안에 계신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성체성사를 “선교활동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5항)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이 신비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내주는 신비임과 동시에 그분의 성체성혈을 먹고 마시는 우리 자신에 관한 신비이기도 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도 예수님의 정체를 묻는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라는 헤로데의 질문과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는 베드로의 고백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결국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 신원을 밝혀줍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신원과 성체성사와 관련하여, 제자인 우리가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날이 저물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군중을 돌려보내시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이에, 그들을 위하는 마음이 없고 자신들의 안위를 위하고 있는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습니다.”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자리 잡게 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다.”(루카 9,16). 오늘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이 명령을 받은 “제자들의 사명”에 귀 기울여 봅니다.
아라비아의 신비가 사디가 전한 우화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깊은 숲 속을 걷던 한 수행자가 네 다리가 전부 없는 여우를 보았습니다. 그는 그 여우가 어떻게 먹고 사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우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서, 호랑이 한 마리가 포획물을 입에 물고 와 자기 배를 채우고 나더니, 나머지를 여우를 위해 남겨 놓았습니다. 다음 날도 신은 같은 방식으로 여우가 굶주리지 않게 해 주었습니다. 수행자는 깨달았다는 듯이, 혼자 말로 중얼거렸습니다. “나도 구석에 가만히 앉아 신의 사랑만 믿으면, 내게 필요한 것을 모두 주시겠지?” 그는 그대로 몇 날 며칠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 죽어갈 지경이 되었을 때, 그의 귀에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 그릇된 길로 들어선 자여, 진실을 향해 눈을 뜨라! 내가 너를 이 자리로 이끈 것은 할 일 없는 여우 흉내나 내라는 것이 아니라, 호랑이를 본받으라는 것이었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호랑이에게 포획물을 얻을 힘을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이미 그러할 힘을 주셨습니다.
어느 날, 한 수도자는 벌거벗고 굶주린 채로 길거리에서 벌벌 떨고 있는 소녀를 보았습니다. 그는 화가 치밀어서 하느님을 성토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왜 두고만 보십니까? 왜 아무 것도 안 하시는 겁니까?” 하느님께서는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불현듯 대답하셨다. “내가 아무 것도 안 했다니, 너를 만들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로부터 생명의 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리 없는 여우’를 보내주셨고, ‘굶주린 소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하시며, 또 “빵을 떼어 주시며, 나누어 주어라.”(루카 9,16)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몸”은 인간관계를, “피”는 생명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로 당신의 생명을 주시어 우리의 관계를 새롭게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신원’입니다. 다름 아닌 ‘사랑’이라는 신원입니다. 이 사랑은 오늘 <제2독서>에서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주시면서 하신 말씀,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1코린 11,24)라는 말씀에서, “위하여”라는 표현으로 드러납니다. 또한 이 표현은 마태오(26,28), 마르코(14,24), 루카복음(22,20)의 ‘성찬례 제정’ 장면에서 피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도 표현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후에, 빵을 들고서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몸”이라고, 또 잔을 들고서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라고 축성할 것입니다. 그러니 성체성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현존의 신비’를 재생시키는 동시에,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하여 당신의 최고의 사랑을 쏟으시는 순간에 봉헌하신 ‘생명의 신비’를 재현시킵니다. 그렇습니다. “형제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삶”,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체성혈의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어 줌”, “떼어 나누어 줌”, 이는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자신을 “떼어 줌”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다른 무엇이 아닌, 우리 자신을 ‘떼어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아멘.
하오니 주님!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시고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시고 제 자신을 떼어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주님!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시고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시고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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