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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영근 신부님_“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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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5-07-13 조회수77 추천수5 반대(0) 신고

* 오늘의 말씀(7/13) : 연중 제15주일

* 제1독서 : 신명 30, 10-14 * 제2독서 : 콜로, 1, 15-20

* 복음 : 루카 10, 25-37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 <오늘의 말씀>

7월의 무더위가 한창입니다. 불타는 사랑을 그려봅니다.

이채 시인의 “7월의 꿈꾸는 사랑”을 떠올려봅니다.

하찮은 풀 한 포기에도/ 뿌리가 있고/ 이름 모를 들꽃에도/ 꽃대와 꽃술이 있지요

아무리 작은 존재라 해도/ 갖출 것을 다 갖춰야// 비로소 생명인 걸요//

뜨거운 태양 아래/ 바람에 흔들리며 흔들리며/ 소박하게 겸허하게 살아가는/

저 여린 풀과 들꽃을 보노라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견딜 것을 다 견뎌야// 비로소 삶인 걸요//

대의만이 명분인가요/ 장엄해야 위대한가요/ 힘만 새다고 이길 수 있나요/

저마다의 하늘을 열고/ 저마다의 의미를 갖는/ 그 어떤 삶도// 나름의 철학이 있는 걸요//

어울려 세상을 이루는 그대들이여!/ 저 풀처럼 들꽃처럼/ 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 무엇 하나 넉넉하지 않아도/ 이 하루 살아 있음이 행복하고/ 더불어 자연의 한 조각임이 축복입니다

오늘 <복음>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초라해진 저의 모습을 봅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처럼, 길을 피해 달아나는 저의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낯선 이를 여관으로 옮겨가며 돌보아 준 사마리아인의 용기와 사랑 앞에, 그지없이 부끄럽고 숙연해집니다. 말없는 그의 헌신과, 뒷날까지 챙겨주면서도 고요히 떠나는 그이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두 번의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이 질문 뒤에는 율법교사의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고 있습니다. 마치 스스로의 행실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무엇을 하느냐?’라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라는 ‘존재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묻기 전에, 오히려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깨닫고, 주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달려 있다는 것과, 자신은 그분께 매여있는 존재임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직책(소임)을 맡느냐?’보다, ‘어떤 존재로 그 직책을(소임)을 수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두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이 질문 뒤에도 역시 그의 옹졸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는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지? ‘사랑의 대상에 한계’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의 사랑의 대상에는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예수님께서는 ‘누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 대답하기보다, 오히려 ‘모든 이웃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모두에게 ‘이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고 묻기보다, ‘나는 이웃이 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곧 ‘그가 나의 형제인가?’를 묻기에 앞서, ‘나는 그의 형제인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내가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하는 일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대화의 마지막 구절인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10,37)라는 말씀에 있을 것입니다.

이는 아는 것에 멈추지 말고, ‘행동으로 실행하라’는 요청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몸으로 하라는 말씀이요, 의무적으로나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표현해 줍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먼저 그 힘을 주셨습니다. 이를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14)

이는 이미 우리 안에 말씀이 와 계시니, 그 말씀을 입으로 선포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2독서>의 ‘그리스도 찬가’ 역시 만물이 그분 ‘말씀’에서 창조되었고, 그분 안에 우리가 존속함을 말해줍니다(골로 1,15-20). 곧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사마리아인처럼 그렇게 해야 할 일입니다. 곧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주님!

초라해진 저의 모습을 봅니다.

초주검 당해 쓰러진 이들이 여기 저기 웅크리고 있건만,

나는 그들과는 반대방향으로 달리는 열차에 앉아 핸드폰을 바라보며

혀만 끌끌 차면서 슬며시 길을 피해 슬금슬금 달아나고 맙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묻기보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게 하소서!

그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사랑이 필요하기에 사랑하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기보다,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사랑을 간직한 사람, 무엇을 하더라도 사랑으로 하는 사람 되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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