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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경 통독을 많이 하면 그만큼 착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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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백봉 쪽지 캡슐 작성일2025-07-15 조회수89 추천수2 반대(0) 신고

 

 

 

 

2025년 다해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성경 통독을 많이 하면 그만큼 착해질까?> 

 

 

 

 복음: 마태오 11,20-24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 작, (1600-160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그 도시들에서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지만,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마태 11,21)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질문을 던집니다.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 중요한 영적 원리가 숨어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그것을 소화시켜 영양분으로 만드는 시간이 필요하듯, 하느님의 말씀이나 기적이라는 영적인 양식도 우리 안에서 살과 피가 되기 위한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묵상’이라고 부릅니다. 묵상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되새기고, 그 의미를 깨닫고, 마침내 삶을 바꾸는 결심, 즉 ‘회개’로 나아가게 하는 영혼의 소화 과정입니다. 

 

 

    오늘 복음의 도시들은 기적이라는 진수성찬을 맛보기만 했을 뿐, 그것을 묵상으로 소화시켜 회개라는 영양분으로 만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늘에서 내린 만나(기적)는 먹었지만, 믿음으로 바위를 쳐서 나온 생수(회개)는 마시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소화되지 않은 음식은 오히려 몸에 해롭듯, 묵상 없는 기적 체험은 영적 교만으로 이어져 더 큰 심판을 부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보고도 믿지 않는’ 비극은 역사 속에서도 반복됩니다. 

19세기 조선, 흥선대원군의 시대를 생각해 봅시다. 당시 조선의 문 앞에는 거대한 ‘시대의 표징’이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서양의 검은 배, 이양선(異樣船)이 출몰했고, 목숨을 바쳐가며 새로운 하느님을 증거하는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가 이어졌습니다. 이것들은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명백한 신호이자, 기존의 질서만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강력한 표징이었습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그 표징들을 어떻게 ‘소화’했습니까? 그는 변화의 가능성을 묵상하며 미래를 준비하기보다, 오직 ‘위협’으로만 해석했습니다. 그의 눈에 서양 세력은 왕권을 위협하는 오랑캐였고, 천주교는 성리학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표징 앞에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과거의 질서를 지키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며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고, 전국에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즉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척화비를 세웠습니다. 결국 조선은 변화의 물결을 외면한 채 문을 닫아걸었고, 머지않아 더 큰 힘에 의해 강제로 문을 열리고 국권을 상실하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반면에, 아주 작은 표징이라도 그것을 깊이 묵상하여 위대한 믿음에 도달한 이들도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순교자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입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 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에 정통한 학자였습니다. 그에게 천주교 교리, 즉 ‘서학(西學)’은 그저 하나의 새로운 학문, 낯선 사상(표징)으로 다가왔을 뿐입니다. 다른 많은 유학자들처럼, 그는 그것을 쉽게 비판하고 배척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달랐습니다. 그는 이 낯선 가르침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자신의 모든 지성과 영혼을 다해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 인간 영혼의 불멸, 상선벌악과 같은 교리들을 깊이 연구하고 되새겼습니다. 이 묵상의 과정 속에서 그는 천주교가 단순한 서양 학문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과 목적에 답을 주는 참된 진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의 묵상은 너무나 깊어서, 마침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국 최초의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저술하기에 이릅니다. 

 

 

    오늘 복음의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엄청난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묵상이라는 소화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미사 안에서 말씀과 성체라는 기적을, 그리고 일상 속에서 수많은 주님의 손길이라는 표징을 만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또 읽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건으로만 여긴다면, 우리 역시 코라진과 벳사이다의 사람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이든 기적이든, 우리가 받은 은총은 반드시 묵상하고 생각하고 소화시키는 과정을 거쳐야만 참된 믿음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사제로서 이 묵상의 힘을 절감하며 살아갑니다. 신학교 시절, 성체를 영할 때 제 마음속에 아주 선명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거의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저는 이 짧은 한마디를 되새길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습니다. 때로는 위로로, 때로는 질책으로, 또 때로는 제 소명을 확인시켜주는 빛으로 다가옵니다. 그 말씀이 제 안에서 계속 소화되면서, 지치고 나태해질 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제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도록 이끄는 힘이 됩니다. 하나의 말씀, 하나의 성체라는 표징이 수십 년에 걸쳐 한 사람에게 끊임없는 영적 영양분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묵상의 힘입니다. 부족한 제가 체험한 것처럼, 말씀과 표징의 소화불량에 시달리지 말고, 깊이 되새기는 은총의 시간을 꼭 가지시길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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