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신앙생활은 멍에도 아니고 의무도 아니고, ‘기쁨’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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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신부님_“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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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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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7-17 | 조회수56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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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1) 이 말씀에서, ‘내 멍에’ 라는 말과 ‘내 짐’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복음과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멍에’와 ‘짐’으로 표현한 것은 진짜로 멍에와 짐이라는 뜻이 아니라, ‘반어법적 표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은, “나의 가르침들은 멍에가 아니라 ‘편안함’이고, 짐이 아니라 ‘가벼움’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온갖 멍에들과 짐을 벗겨내고 우리에게 참된 평화와 안식을 주는 열쇠입니다. <만일에 ‘멍에’ 라는 표현만 보면서, 이 말이 반어법적 표현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들과 계명들이 멍에와 짐이라는 생각만 한다면, 그것은 크게 오해하는 것이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아무리 편안해도 멍에는 멍에일 뿐이고, 아무리 가벼워도 짐은 짐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멍에와 짐을 ‘완전히’ 제거해서 우리에게 ‘참 해방’과 ‘참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안식을 받아서 누리는 ‘기쁨의 생활’입니다. 만일에 기쁨은 조금도 없이 무거운 짐을 지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생활은 그냥 강제노동일 뿐입니다.
2) 신앙인들 가운데에는, 자신의 ‘십자가’를 ‘멍에’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신앙인에게 십자가는 멍에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좀 더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십자가는 멍에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말씀은,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과정’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앙인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운동선수가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 훈련을 하는 것과 같고, 학생들이 합격하기 위해서 시험공부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훈련이 힘들다고 피해버리면 금메달을 포기하는 것이고, 시험공부가 힘들다고 안 하면 합격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은, 죄에 대한 벌이나 보속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일이고, 누구에게나 구원과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 즉 단련과 정화 과정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의 십자가는 나를 위한 것입니다.>
3) 판공 때가 되면 고해성사 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이 있고, 고해성사를 멍에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고해성사는 멍에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신앙인들만이 특별히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고해성사가 은총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멍에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회개도 멍에가 되어버립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회개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일상적인 신심생활, 전례 참여, 기도, 봉사활동 등도 모두 멍에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의무적으로, 또 억지로 하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4) 28절의 ‘고생’과 ‘짐’은 좁은 뜻으로는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인생살이의 고달픔을 포함해서 인간을 괴롭히는 온갖 억압을 가리킵니다. 좁은 뜻이든지 넓은 뜻이든지 간에, 예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고 안식처이신 분입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5)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말씀 가운데 다음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 23,4).” 종교 자체가 멍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유대교만의 문제가 아니고,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도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종교와 신앙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입니다.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와 신앙이 멍에로 변질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종교 지도자들의 탓입니다. 법과 제도로 사람들을 묶어놓고,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자기들이 교회 운영을 잘하고 있다고 자만하는 지도자들도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공동체 정신이라고 착각하는 지도자들도 있습니다. 어떻든 종교 지도자들이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군대 지휘관 같은 모습으로 직무 수행을 하는 것은, 종교를 멍에와 짐으로 변질시키는 죄입니다. 교회는 누구에게나, 즉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안식처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교회가 누군가에게 멍에가 되고 짐이 되고 부담이 된다면, 그것은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 죄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큰 죄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출처]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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