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환대의 사랑 “주님의 환대를 평생 배워 실천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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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선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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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7-20 | 조회수117 | 추천수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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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7.20.연중 제16주일
창세18,1-10ㄴ 콜로1,24-28 루카10,38-42
환대의 사랑 “주님의 환대를 평생 배워 실천합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주님의 초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주님입니다. 예외없이 고달픈 광야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환대하시는 주님입니다. 이런 주님의 환대를, 환대의 사랑을 평생 배워 실천해야할 우리들입니다. 환대의 요셉수도원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환대했던 마르타, 마리아가 살았던 환대의 집, <베타니아>에 버금가는 환대의 집 요셉수도원입니다.
요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환대의 집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수도원의 정문과 성당문은 1987년3월19일 개원후 만38년 동안 언제나 활짝 열려 있었으니 제가 산 증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환대의 집 요셉 수도원에는 끊임없이 손님들이 줄을 이으며 현재도 두분의 손님 사제들이 머물고 있습니다.
우리 옛 고향마을 집들은 거의 열려 있는 환대의 집에 사랑방이라는 환대의 공간도 있었는데 오늘날 곳곳에 감시카메라 CCTV요 비밀번호를 알아야 들어갈 수 있는 닫혀진 문이요 환대의 미풍은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제 집무실이자 고백상담실 역시 활짝 열린 환대의 방으로 천장암 또는 지족암이라 부르곤 합니다. 자주 꽃꽂이를 해주는 자매에게 드린 덕담도 생각납니다.
“꽃 사노라 많은 돈 쓰셨네요. ‘돈은 날개들을 갖는다(Money has wings)’ 라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집무실엔 꽃이 필요없어요. 꽃대신 꽃보다 더 예쁜 자매님이 잠시 머물다 가면 됩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 “주여, 당신 장막에 묵을 이 누구오리까?” 물음에 이어 시편 화답송 답이 나오는데 저는 한마디 ‘환대의 사람!’ 답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정말 따뜻하고 친절한 환대의 사람은 주님 환대의 장막에 머물 자격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가장 좋은 몫을 택하였으니 아무도 그몫을 빼앗지 못하리라.”
오늘 복음의 핵심 구절에 근거한 엊저녁과 아침성무일도시 노래한, 주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는 경청에 환대의 우선순위를 두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영성, 참 아름다운 환대의 수행입니다. 환대하면 떠 오르는 오래전 <환대>라는 자작 애송시입니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얼굴 찌프린적 있더냐 하루 이틀 몇날이든 정주의 거기 그 자리에서 언제나 활짝 핀 웃음 가득 환한 얼굴로 오가는 이들 맞이하고 떠나 보내는 주차장 옆 코스모스 꽃 무리들 피곤하거나 싫증난 모습 전혀 없다 볼 때 마다 환해지는 마음이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2000.9.27.>
지금도 하느님의 환대를 닮은 꽃들을 보면 연상되는 위 환대라는 시입니다. 환대의 사랑이, 환대의 영성이 참으로 절박한 시대입니다. 비단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물을 대하는 근본 자세가 환대의 영성입니다. 환대는 어떻게? 바로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첫째, 주님을 환대하십시요. 우리를 환대하시는 주님께 대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의무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공동미사전례시간은 물론 공동성무일도 시간 역시 주님을 환대하는 시간입니다. 자발적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오늘 복음의 마르타, 마리아 자매들처럼 주님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둘다 각자 나름대로 환대의 사랑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환대의 우열 문제가 아니라 우선 순위였습니다. 마르타의 음식 대접의 환대의 사랑도 귀하기 그지없습니다.
바로 그 앞의 착한 사마리안의 비유를 통해 사랑의 실천 행위가 얼마나 참된 이웃의 기초가 되는지 우리는 공부했습니다. 다만 주님의 환대에 있어서는 주님 말씀의 경청이 우선임을 잊은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마르타에 대한 주님의 신뢰와 사랑은 깊고 깊음을 느낍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름을 다정히 두 번 부르며 애정이 가득 담긴, 환대의 우선순위를 일깨우는 충고요 일종의 내적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활동에 앞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관상이 있어야 눈먼 맹목적 활동주의(activism)에 빠지지 않을뿐더러 주님의 뜻에 맞는 활동이요 삶에도 중심과 질서가 잡힙니다.
둘째, 말씀을 환대하십시오. 말씀의 환대는 그대로 주님의 환대가 됩니다. 그래서 옛 성서의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명령하셨고 성 베네딕도 역시 “아들아, 들어라!”로 그의 규칙을 시작합니다. 말씀은 빛이요 생명이요 영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내 앞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말씀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영혼이 말씀과 하나될 때 영혼도 살아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었으니 바로 예수님입니다. 말씀은 주님의 현존이자 인간의 본질입니다. 시편 저자는 “새벽부터 당신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 고백합니다. 바로 말씀의 환대는 궁극에는 말씀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환대가 됩니다. 교회의 일꾼이 되어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는데 온힘을 다하는 바오로의 고백은 바로 말씀의 환대가 그리스도의 환대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참으로 자나깨나, 언제 어디서나 말씀을 환대할 때 우리의 스승이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끊임없이 가르치고 깨우치시어 날로 우리의 희망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게 합니다.
셋째, 사람을 환대하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현존입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전심전력을 다해 세 손님들을 환대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알고보니 한분은 주님이요 두분은 천사들이었습니다. 손님들을 대접한 것이 주님을 대접한 것이니 말 그대로 대박(?)입니다. 이런 무욕의 순수한 환대에는 주님의 보답이 있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아브라함의 아내, 노년의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축복의 선물을 약속합니다. 사람 환대는 그대로 주님 환대와 직결됩니다.
엠마오 산보시 동행하던 나그네를 환대하니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었고, 주님은 작은 형제들에게 선행을 베푼 것이 바로 당신께 행한 것이라며 작은 이들과 자기를 일치시킵니다. 성 베네딕도는 이 복음 말씀에 근거하여 그의 규칙서에서 찾아 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라 신신당부합니다. 만나는 모든 이를 환대함으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환대하듯 형제자매들을 환대하는 이들이 진짜 사랑의 신비가들입니다.
날마다 미사전례보다 더 좋은 환대의 실습은 없습니다. 주님은 미사전례를 통해 우리를 환대하시고 우리 역시 동시에 마음 활짝 열어 주님을 환대합니다. 주님의 환대와 우리의 환대가 만남으로 온전한 치유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주님은 이어 우리 모두 광야 세상에 오아시스같은 환대의 사람으로 파견하십니다. 제 좌우명 기도중 한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수도원의 정주영성에 짝을 이루는 환대영성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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