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하느님의 은총은 열린 자가 더 많이 /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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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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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7-23 | 조회수83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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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어쩌면 희망의 지상 순례자로 자처하는 우리는 세상 것에 귀가 너무 밝아 진정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눈이 너무 밝아 진정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기도 한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중복 장애인으로 살았던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는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나 자신과 내 일과 나의 하느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라고 고백했다. 그녀는 장애인이었지만, 영혼은 오히려 더 밝고 맑았단다.
경륜 깊은 석공은 바위를 정으로 두드려서 소리만 듣고도 돌의 성질과 결을 알 수가 있단다. 나무를 오래 다룬 목수는 나무 겉모습만 보고도 나이테와 나뭇결을 읽어 낼 수가 있다나.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따르는 우리 영성도 경륜 깊은 석공이나 목수처럼 되어야만 할게다. 들리는 소리보다 더 깊은 곳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보이는 것 너머의 먼 곳도 상상해야만 한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 것을 넘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며 살아야만 하니까.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그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비유로 말하는 것은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기에. 그러나 너희는 볼 수 있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를 못하였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없는 이’가 그나마 ‘있는 것’마저 다 빼앗긴다니 참 이상하다. 이는 물질을 두고 하신 게 아닌 듯하다. 아무도 믿음의 세계에서만 있을 법한 신비의 은총일 게다. 합당하게 살지 않으면 주어진 은총마저 사라지기에. 언제나 좋은 길만 걷는 이 없고, 가끔 포장 안 된 길도 간다. 이렇게 평탄한 길만 걷는 것도 아니다. 걷다 보면 포장된 길도 나타난다. 새로운 출발은 언제나 은총이리라. 신앙생활은 한 그루 나무를 정성스레 키우는 일이라나. 강한 나무는 건강한 뿌리를 지녔다. 오랜 가뭄에도 뿌리가 튼튼하기에 그 나무는 쉬이 시들지 않는다. 그러나 뿌리가 시원찮으면 그 나무는 알게 모르게 생기를 잃게 되리라. 기도생활을 중단하지 않는 것이 뿌리에 활력을 넣어주는 일일게다. 미사에 자주 참여하면서 선행 베푸는 일에 적극적이면, 나무에 물주는 격이다. 사실 씨 뿌리는 농부는 열매 맺을 땅에만 골라 뿌릴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 복음은 모든 곳에 골고루 뿌려진다. 어느 누구인지 따지지 않고 복음이 선물로 주어진다. 이를 받은 이의 기쁨의 정도는 각자가 받아들이는 마음의 몫이다. 온전히 마음을 연 이에게는 몇 백배의 기쁨으로 드러날게다. 그러니 열린 이에게는 더 많은 걸 얻으리라. 물론 예수님께서도 더 주고 싶을 게다. 그러니 내 것만을 고집하지 말고, 상대를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필요할 수도.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행복으로 알아듣지 못할 때 우리는 얼마나 불행할까? 그래서 잘 들으려 귀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해야만 한다. 그분 말씀은 사랑 없이는 알아들을 수 없기에. 사막을 지나는 자만이 오아시스를 발견할 게다. 삶이 꽉 닫힌 것처럼 느껴진다면, 내 안에 잠재된 참 모습을 꼭 찾아내야 한다. 열린 자는 분명 더 받을 게다.
연중 제16주간 목요일(마태 13,10-17) https://blog.naver.com/bigllightqa/223944562509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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