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말씀’을 이해하는 것보다 ‘믿는 것’이 먼저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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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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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7-24 | 조회수75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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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마태 13,10-17)”
1)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입니다(13절). 당신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비유로 말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믿음에 도달하는 과정’, 또는 ‘믿음’을 뜻합니다.>
2)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고, 받아들이고, 믿는 일은, ‘지능’에 관한 일이 아니라, ‘지향’에 관한 일입니다. 머리가 좋다고 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알아듣고 잘 받아들이고 잘 믿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지향과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합니다. 머리가 나쁘다고 해서, 또는 지능이 낮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구원을 못 받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생활과 구원은 지능과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구원받기를 원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한다면, 지능과는 상관없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은 안 받으려고 하고, 자기가 갖고 싶은 것만, 즉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받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믿지 못합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아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고, 받으려고 하지 않아서 못 받는 것이고, 믿으려고 하지 않아서 못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어떤 곳인가?”, “어떻게 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또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을 가르치실 때에는 비유를 사용하셨지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는 비유를 사용하시지 않고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이 좋은 예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3-55).” <우리 교회는, 이 말씀은 비유도 아니고 상징도 아니고,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계시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때문에 제자들(신앙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버렸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 6,60.66).”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라는 말에는 믿을 수 없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쉽게 풀이해 주시거나 표현을 바꾸시지 않았고, 더욱 강경한 모습으로 사도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라고 물으셨습니다(요한 6,67). 그 질문은,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이해도 안 되고 믿을 수도 없어서 떠나고 싶다면, 떠나라.”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 사도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라는 대단히 중요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이 말에는, “이해가 안 되지만 ‘생명의 말씀’이라고 저희는 믿고 있습니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에서, 우리는 “이해보다 믿음이 먼저” 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먼저 믿으면, 언젠가는 깨닫게 되고, 그 깨달음은 믿음의 완성으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4) 성경 본문보다 해설이 더 어려운 경우가 있고, 그 경우에 해설 때문에 성경이 더욱더 어려운 책이 되어버립니다. 성경 말씀을 해설하면서, 어려운 전문 용어들을 잔뜩 사용하는 것은 결코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성서학자들은,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하는 척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여간에, ‘이해보다 믿음이 먼저’ 라는 원칙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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