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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오,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여! “사랑의 신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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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선우경 쪽지 캡슐 작성일2025-11-03 조회수61 추천수3 반대(0) 신고

2025.11.3.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로마11,29-36 루카14,12-14

 

 

오,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여!

“사랑의 신비가”

 

 

“하느님, 당신의 크신 자애로,

 당신 구원의 진실로 제게 응답하소서”(시편69,14ㄴ)

 

깊어가는 만추晩秋의 오늘 밤, 별들은 더욱 맑고 밝게 빛났고, 북두칠성도 뚜렷했습니다. 어제는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위령의 날이었고 별들을 보는 순간, 세상 떠난 그리운 얼굴들에 떠오른 오래전, 많은 분들이 열광했던  <별>이란 무려 28년전 49세때 쓴 자작시였습니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병이 된다 하지만

 당신 향한 내 그리움은 기도가 되고

 별이 됩니다.

 당신 영혼의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수호천사 별이 되어 언제나

 당신을 비출 것입니다.”<1997.11. >

 

좋은 신자, 착한 신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 신비가가, 사랑의 신비가가 되어야 합니다. 요즘 신자들의 치명적인 손실은 신비감각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비감각을 잃어버린 무수한 신학적 지식들은 공해요 쓰레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신비, 자연의 신비, 삶의 신비앞에 놀랄줄 알아야하고 침묵할 줄 알아야 합니다. 

 

20세기 영성의 시대에는 누구나 신비가가 되어야 한다고 20세기 대 신학자 칼 라너는 말했습니다. 제가 평생 수십년을 두고 감동깊게 읽고 있는 유다인 랍비이자 신비가인 여호수아 헷쉘의 책, <사람을 찾는 하느님>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놀라움>입니다.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살아 있음의 놀라운 신비에 대해 무관심하는 것이 죄의 뿌리이다. 놀라움 또는 근본적인 경탄은 자연과 역사를 대하는 종교인의 기본태도다. 문명이 발전할 때 놀라움의 감각은 후퇴한다. 인류가 멸망한다면 그것은 정보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놀라움을 올바로 감상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놀라움이 없는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음을 이해하는 데서 우리의 행복은 비롯된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믿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놀라려는 의지다. 하느님에 대한 앎은 놀라움에서 시작된다. 매일같이 놀랄 필요가 있기 때문에 매일같이 예배를 드릴 필요가 있다. 날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기적들에 대한 감각과 계속되는 놀라운 일들에 대한 감각이, 깨달음이 기도의 원천이다. 시편은 대부분 삶의 기적들을 발견한 놀라움에서 솟아난 찬미와 감사의 고백이다.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이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은 이 몸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시편139,14).”

 

사랑의 신비가 입에서 쏟아지는 감탄사가 “놀랍다, 새롭다, 좋다”등 끝이 없습니다. 놀라움에 대해 공부하다보니 제가 쓴 짧은 선시禪詩같은 시들은 이런 놀라움에 대한 깨달음에서 나온 열매임을 깨닫습니다. 자작시 두편 소개합니다.

 

‘아침의 자연은 늘 놀랍다, 새롭다, 좋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밤의 침묵과 휴식 때문이다

 “아침을 먹었느냐?”가 아닌 

 “아침을 보았느냐?” “아침을 들었느냐?” 

 인사할 수는 없을까

 똑같은 사람, 환경, 말과 글도

 살아 있으면

 침묵의 밤이 있으면

 늘 새로운, 놀라운, 좋은 아침일 수 있다’<1997.8,16>

 

“아침”이란 시에 이어 “임맞을 준비는 끝났다”라는 시입니다.

 

‘하늘 향해 쭉쭉 뻗은 은행나무들

 임맞을 준비는 끝났다

 마침내 노랗게 물든 사랑의 단풍잎들 다 쏟아

 노오란 길 만들어 놓고 임 기다리는 은행나무들!

 너무 아름다워 슬프고 깊어 고요한 노오란 단풍잎길

 묵묵히 임기다리는 은행나무들!

 나 이런 사랑 본 적 없다’<2000/11/10>

 

류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시도 이런 놀라운 깨달음에서 탄생한 것이란 생각입니다. 오늘 로마서에서 대 신비가 바오로 사도의 하느님 찬미가가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남김없이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의 몰락과 그리스도교의 흥기에 대한 하느님 섭리의 신비에 대한 놀라움, 찬미, 감사가 어울려진 고백 <하느님 찬미가>입니다. 너무 아름답고 깊어, 하나도 생략할 수 없어 단숨에 읽히는 전문을 고스란히 인용합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힘듭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께 무엇을 드린 적이 있어 그분의 보답을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이스라엘의 놀라운 신비전통을 고스란히 전수받은 대신비가, 대영성가 바오로 사도입니다. 존재하는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니 그대로 우리의 하느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이 진리를 이해하여 그들 모든 삶의 기초로 삼은 이들은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해 깊이 깨달은 하느님 사랑의 대신비가임에 여실히 드러납니다. 초대 방식이 완전히 파격입니다. 유유상종 끼리끼리의 동호회적 초대가 아닌 혁명적 이타적 아가페 사랑의 초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크게 깨달은 대신비가 예수님의 말씀은 예나 이제나 영원한 진리로 우리의 편협한 교제를 비춰주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역시 단숨에 읽히는 놀랍고 은혜로운 우리가 해야 할 <과제> 전문을 인용합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보답을 바라지 않고 선행과 사랑을 베푸는 이들에게 행복을 약속하십니다. 모두에게 활짝 열린 차별없는 사랑의 실천이요 말 그대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참으로 복음적 교회는, 복음적 수도원은, 복음적 사람은 이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무사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진정 자유롭과 부요하고 행복한 <사랑의 신비가들>이요 이런 삶자체가 그대로 보답이겠습니다.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마음을 닮은 예수님입니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의 사회복지에 원조인 예수님이요 참으로 복지제도의 확산은 하느님의 뜻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이 우리 모두 놀라움의 영적 신비감각을 일깨워 주시고 당신 사랑의 신비가가 되어 살게 하십니다.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시편16,11).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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