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11월 9일 수원교구 묵상글 | |||
|---|---|---|---|---|
| 이전글 |
송영진 신부님_ <신앙생활도, 사랑 실천도 장사가 아닙니다.> |
|||
| 다음글 |
병자를 위한 기도 |
|||
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5-11-09 | 조회수28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
김건태 신부님_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말씀] ■ 제1독서(에제 47,1-2.8-9.12) 바빌론 유배시기 동안 예언자 에제키엘은 동족들을 하나의 현시(現示) 안에 참여케 함으로써 용기를 북돋습니다. 예언자는 현시를 통하여 이미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대체할 새 성전을 봅니다. 이 성전은 새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생명의 샘이 될 것이며, 이 샘에서 흘러나온 물은 죽음의 바다까지 되살릴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요한묵시록에 다시 인용되어, 하느님께서 최후의 축제일에 당신의 자녀들을 불러 모을 새 예루살렘 성전을 꾸며줍니다. ■ 제2독서(1코린 3,9ㄴ-11.16-17)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집’이라는 개념이 품고 있는 영적인 현실을 강조합니다. 이 영적 현실은 바로 그리스도를 기초로 세워진 교회를 말하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교회를 세우는 데 참여하도록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한편 교회는 주님의 성령에 따라 세워질 때만이 견고함을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거룩한 현실로 머물 것입니다. ■ 복음(요한 2,13-22) 예수님은 앞서 카나의 기적을 통하여(요한 2,1-12), 파스카 이후에 그대로 거행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혼인식을 상징적으로 예고하셨으며(요한 2,1-12), 성전에서 물건 파는 이들을 내쫓으시며 못지않은 상징적 행위를 보여주십니다. 탐욕스러운 종교가 발을 뻗는 공간이 되어 그 의미를 상실한 성전은 예수님 안에서 비로소 무상의 사랑이 교환되는 참종교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나아가 주님은 당신이 바로 성전이심을 보여주시나, 이는 부활 이후에야 그분 행적의 의미를 알아듣게 될 제자들에 의해 드러날 것입니다. [새김] ‘집들이’라는 우리에게 친숙한 전통이 있습니다. ‘집들이’하면, 가족과 친지와 친구들을 초대해 음식을 나누며, 특히 거주할 공간을 확보한 당사자들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현실을 먼저 떠올립니다. 이처럼 물리적인 공간은 물리적인 차원을 넘어 집안의 영적인 현실을 내포합니다. 하느님 백성의 역사 안에는, 언제나 큰 의미를 지니는 건축, 그 가운데서도 성전 건축이 있었습니다. 이 공간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자신의 정체성을 다져나갔으며, 나아가 성전을 언젠가 세상 모든 민족이 모여들 범세계적 중심지로 내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세계에서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던 성전 건물은 무너져 사라지고, 이제 예수님이 새 성전, 진정한 의미의 하느님 거처로 자리하며, 그분을 중심으로 하나 된 공동체 또한 주님의 집이 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신앙생활에 필요한 교회 건물을 세워나갔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 건물들은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라는 영적 모습을 지닐 때,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로마의 첫 번째 주교좌성전 봉헌을 경축하면서, 우리는 결국 ‘천상 예루살렘’에 대한 기다림 속에 사람들 사이에 자리한 하느님의 궁극적 거처를 기념합니다.
오늘은 또한 평신도 주일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의 백성’으로 정의되고, 하느님의 백성 대부분이 평신도임을 감안한다면, 오늘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이듯이 교회 구성원들 모두 하나가 되어, 하느님 나라 건설에 힘껏 뛰어들겠다는 다짐으로 오늘 주일과 이한 주간을 다스리며, 신앙의 한 해를 잘 마무리해 나가시기를 기도합니다.
======================================================================================
조욱현 신부님_1. 라떼란 대성전: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며 머리 오늘 우리는 라떼란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낸다. 이 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24년에 세운 로마의 첫 공적 성당이며, 교황의 주교좌 성당이다. 정면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Omnium Ecclesiarum Urbis et Orbis Mater et Caput: 로마와 온 세상의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며 머리.” 이 칭호는 단순히 건물의 위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 교회 일치의 표지를 드러낸다. 우리가 이 축일을 기념하는 것은 돌로 지은 건물을 기억하기 위함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곧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임을 새롭게 자각하기 위함이다. 2. 제1독서: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 예언자 에제키엘은 오늘 제1독서에서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다. “그 물이 흘러내려 아라바로 가서 바다에 이르면, 그 물이 되살아나고, 그곳에 사는 모든 것이 살아난다.”(에제 47,8-9)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하느님의 생명과 은총이 온 세상에 흘러넘치는 표징이다. 죽음의 바다도 이 생명의 물을 만나면 살아난다. 성 이레네오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다. “하느님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그리스도에게서 솟는 생명이다. 그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새 생명을 낳는 성사(聖事)의 원천이다.”(Adversus Haereses IV,33,2)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 곧 세례와 성체의 은총이 교회를 낳고, 오늘의 라떼란 대성전처럼, 세상 안에서 생명을 흘려보내는 살아 있는 성전의 샘이 된다. 3. 제2독서: 우리는 하느님의 건물, 하느님의 성전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고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는 기초 외에는 아무도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1코린 3,9.11)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3,16) 즉 교회의 기초는 사람이나 제도에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자신 안에 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기초로 세워진 살아 있는 돌들(1베드 2,5)이다. 성전은 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모인 신자들의 일치된 삶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구절을 이렇게 풀이한다. “성전이란 금이나 대리석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이다. 하느님께서는 돌벽보다 사랑의 마음 안에 더 기꺼이 머무신다.”(In 1 Cor. Hom. 8,6)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전은 외적인 건물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공동체 안에 세워진 영적 성전이다. 4. 복음: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리라.”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를 맞아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러나 그곳은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집이 아니라, 이익을 추구하는 시장터로 변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분노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하시며 성전을 정화하신다. 그때 유다인들이 표징을 요구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리라.”(2,19) 이 말씀은 당신의 몸, 곧 그리스도 자신을 참된 성전으로 선포하신 것이다. 그분의 몸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난다. 그분의 부활로, 옛 성전은 폐지되고, 새롭고 영원한 성전이 세워졌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완전한 장소, 새로운 성전이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신비를 이렇게 설명한다. “주님께서 성전을 허물고 다시 세우신 것은, 당신의 몸을 부활시키신 것이다.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끊임없이 다시 세워지신다.”(In Ioannem Tractatus 10,13) 5. 우리 자신: 성령의 거처가 된 성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새로운 성전을 세우셨을 때, 그 성전의 벽돌은 바로 우리 각자가 되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 몸은 하느님의 성전이다(1코린 6,19). 성 그레고리오는 말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마음 안에 거하시지 않으면, 성전의 금벽도 그분의 거처가 되지 못한다.”(Hom. in Ez. II,1,3) 따라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의 마음은 어떤 성전인가? 거기에는 하느님이 머무시는가, 아니면 장사꾼의 욕심이 자리 잡고 있는가?” 성전의 참된 정화는,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새롭게 하는 일이다. 우리 안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그분의 은총이 흘러 나가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전 봉헌’의 참된 의미이다. 6. 맺음말: 살아 있는 성전으로 봉헌된 우리 라떼란 대성전 봉헌 축일은 돌로 된 건물의 기념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다시 하느님께 봉헌하는 날이다. 에제키엘의 환시처럼, 우리 안에서 생명의 물이 흘러나가 세상을 새롭게 하게 하고,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기초로 세워진 성전이 되며, 복음의 말씀처럼,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새로워진 성전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오늘 축일의 핵심이다. “주님, 저희 안에 당신의 집을 세워주소서. 저희가 당신의 사랑을 머금은 성전이 되어, 세상에 생명을 흘려보내게 하소서. 아멘.” =========================================================================================================== 전삼용 신부님_성전과 평화와 나는 하나다 성전과 평화와 나는 하나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 성당’이자 ‘머리’가 되는, 최초의 성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하느님의 집’을 기념할까요? 사람은 자기가 사는 ‘집’에 의해 형성됩니다. 신학적으로 ‘집’이란, "지금 나에게 최고로 평화를 주는 것, 그래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품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술병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성전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머무느냐에 따라 나의 정체성, 곧 ‘자존감’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 '브룩스'라는 노인이 나옵니다. 그는 50년이라는 세월을 쇼생크 교도소 안에서 보냈습니다. 50년 만에 '자유'를 얻어 가석방이 결정되자, 그는 기뻐하는 대신 공포에 질려 절규합니다. 칼을 들고 동료를 위협하며 발버둥 칩니다. "제발 나를 내보내지 말아 주시오!" 그에게 자유는 주어졌지만, 세상에 그가 마음 둘 '집'은 없었습니다. 그가 잠시 머물 숙소는 있었지만, 그의 영혼이 에너지를 회복하고 참된 평화를 얻을 '집'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진짜 '집'은, 역설적이게도, 50년 동안 살았던 '교도소'였습니다. 산속의 짐승들에게도 옹달샘이 필요하지만, 천적의 위협 없이 조용히 쉴 수 있는 그들만의 '굴'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브룩스는 나오기는 원했어도, 세상에 자신의 '굴', 즉 새로운 '집'을 마련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차가운 여관방 벽에 "브룩스, 여기에 머물다 감(Brooks was here)"이라는 쓸쓸한 유서를 남기고, 교도소라는 '집'을 잃어버린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라는 지옥의 '집'에 갇히게 됩니다. 그곳은 인간의 모든 자존감을 파괴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강제 노역을 하던 어느 날, 그는 육체적 고통보다 더한 절망감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문득 '아내'를 떠올렸습니다. 함께 있지 못했지만, 그는 의식적으로 '아내'라는 '사랑의 집'에 머무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훗날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는 그때 '사랑'이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궁극적이고 가장 높은 목표임을 깨달았다. ... 한 인간이 모든 것을 빼앗긴 최악의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그녀의 미소를,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구원과 평화를 경험할 수 있다." 빅터 프랭클에게 '집'은 아우슈비츠가 아니었습니다. 수용소는 세상이었습니다. 그에게 보이진 않았지만, 그에게 영원한 평화를 주는 존재, 그의 '아내'가 곧 그의 '집'이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생각할 때마다, 이 거친 환경을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다시 ‘쇼생크 탈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주인공 '레드' 역시 브룩스와 똑같이 수십 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똑같이 가석방되었습니다. 그 역시 브룩스처럼 혼란스러웠고, "브룩스, 여기에 머물다 감"이라고 쓰인 그 방에 머물게 됩니다. 그 또한 브룩스와 같은 비극적 결말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레드에게는 그를 기다리는 '친구', 앤디가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늘 대화하며 희망을 나누던 그 친구가 그의 '집'이 되어 주었습니다. 브룩스에게는 돌아갈 교도소 외에 아무런 '집'이 없었지만, 레드에게는 '친구를 만나러 가야 한다'라는 새로운 '집'(목표이자 평화)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친구'라는 집을 찾아 태평양의 작은 해변으로 떠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내며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나에게 가장 큰 평화를 주는, 나의 진짜 '집'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에게 집은 '통장 잔고'일 수 있습니다. 잔고가 늘어날 때 평화를 얻습니다. 어떤 분은 '자녀'나 '아내'일 수 있고, 어떤 분은 '술'이나 '운동'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궁극적인 '집'이 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아이들의 집은 부모입니다. 다리 밑에서 살아도 부모만 있다면 집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집은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줄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것으로는 세상 것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집으로 삼는 자만이 세상을 이기는 힘을 지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위대한 집은 '하느님의 집'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집 안에서조차 '돈'과 '명예'(상거래)를 그들의 더 큰 평화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집'이 오염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집'을 정화하셔야만 했습니다. 모든 집은 생존을 위협하는 공포로부터 탈출하여 쉬는 곳입니다. 그 집의 주인이 부활하신 분이시라면 그 집에 사는 이들은 죽음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부모가 아래 있으면 무조건 부모가 받아줄 줄 알고 뛰어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관련된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1912년 타이타닉호의 침몰과 함께한 이시도르와 아이다 스트라우스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메이시스 백화점의 소유주였던 이시도르는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 아이다에게는 당연히 구명보트의 자리가 주어졌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곁을 지키던 하녀 엘렌에게 자신의 비싼 모피 코트를 벗어주며 보트에 태워 보낼 만큼, '물질'이라는 집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선원들이 그녀를 재촉했지만, 아이다는 구명보트에 오르기를 단호히 거절하고, 남편 이시도르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는 긴 세월을 함께 살아왔어요. 당신이 가는 곳에, 나도 가겠어요."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아이다에게 '참 평화를 주는 집'은 구명보트가 아니라, 바로 그녀의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은 하느님이라는 영원한 '집'에 머물렀기에, 이 세상 가장 큰 '집'(타이타닉)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생명'이라는 집착을 넘어서 타인에게 생명을 양도하면서도 죽음 앞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자기 생존을 의탁하는 집이 있고 그 집과 같은 운명을 맞습니다. 하느님의 집에 살면 이시도르와 아이다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고, 그리스도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나 세상 것에 의탁하면 그것들과 함께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이 자기 정체성에서 오는 자존감에 있습니다. 위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평생토록 세상의 쾌락과 명예라는 '집'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참된 '집'을 찾고 나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를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하셨기에, 저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기(머물기)까지 평화를 누리지 못하나이다." (고백록) '쉼', '머무름', '평화'. 이것이 바로 '집'의 본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가장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빈다." (요한 20,19) 이 평화를 주시는 분, 우리가 영원히 머물러야 할 '집'이신 그분께서, 지금 바로 저 '감실'에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삶이 힘든 데 왜 찾아오지 않습니까? 왜 그토록 지쳐 있으면서, 평화 그 자체이신 당신의 '집'에 머무르지 않습니까? 각자 자신의 본당(성전)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성체조배'를 하십시오. 성체조배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참 집'이신 주님 앞에 조용히 '머무는' 연습입니다. 그분의 평화를 내 마음 깊이 새기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그 '집'을 내 안에 품고 사는 사람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하느님의 집을) 당신 안에 모시고 당당하게 엘리사벳에게 걸어가셨던 것처럼, 이 세상 누구도, 그 어떤 절망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이병우 신부님_"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2,21) '교회의 보물인 평신도!' 오늘 복음(요한2,13-221)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말씀'입니다. 복음에 드러나 있는 예수님의 분노는 '위선자들에 대한 분노'(마태23,1-36)와 '예루살렘 성전 정화 때 분노'(요한2,13-22)입니다. 하느님의 집이 장사하는 집으로 되어있는 모습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환전꾼들을 성전에서 모두 쫓아내시고, 그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2,16)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2,19) '성전(성당)은 하느님의 집'입니다. '성전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성전은 친목 모임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성전은 사람을 만나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성전에 오는 이유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을 만나, 나의 몸이 하느님의 성전, 성령의 성전, 은총의 성전으로 거룩하게 변모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성당)이 존재하는 근본이유'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그 건물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9.11.17)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는 하느님의 백성 중에서 성직자가 아닌 모든 신자를 가리킵니다. 평신도는 교회의 보물입니다. 평신도가 없으면 교회의 존재도, 발전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성전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 나옵니다.(제1독서 참조) 이 생명의 샘으로 너와 세상을 거룩하게 변모시킵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4.16)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