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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영진 신부님_<주님께서는 충실한 신앙인들에게 크게 고마워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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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5-11-11 조회수35 추천수1 반대(0) 신고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7-10).”

1) 이 말씀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하느님께 생색내지 말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내가 살기 위해서’,

즉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색낼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살고 싶은 사람이(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기서 ‘종’이라는 표현은 겸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는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탄생 예고를 들었을 때 성모님께서

응답 말씀에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경우와 비슷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말씀은, ‘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한다는

응답이 아니라, 마치 종이 주인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기꺼이’ 하느님 뜻에 순종하겠다는 응답입니다.

<성모님 자신이 스스로 낮추신 것입니다.>

2)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라는 말씀은,

하느님이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엄격하고 차가운 분이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인의 겸손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충실한 신앙생활을 보시면서

크게 기뻐하시고, 크게 고마워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것을 크게 기뻐합니다(루카 15,22-24).

아버지가 아들에게 고마워했다는 표현은 없지만,

크게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작은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것에 대해서 크게 고마워하고 있음이 잘 보입니다.

바로 그런 아버지의 심정이 곧 하느님의 심정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3) 예수님 말씀에는, 우리가 받게 되는 구원과 생명은

신앙생활의 대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비와 은총이라는 가르침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권리나 권한을 가지고서 요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께 자비를 ‘간청’할 뿐입니다.

만일에 인간에게 무슨 권리나 권한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 쪽에 무슨 의무가 있다는 것이 됩니다.

정말로 만일에 그렇게 하느님 쪽에 무슨 의무가 있다면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주님이 아닌 분이 되어버립니다.>

4) 들에서 일하다가 돌아온 종에게 다시 집안일을 시키는

주인의 모습도 겸손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앞의 12장을 보면 정반대인 ‘주님의 모습’을

묘사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5-37).”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를

보면, 바로 그렇게 시중을 들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2-13).”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벌이라고 하인들에게 ‘지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아들 곁에 붙어 앉아서 빵과 고기를 집어 주면서

시중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5) 10절의 ‘쓸모없는 종’이라는 말은,

실제로 우리가 쓸모없다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표현일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칠삭둥이,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1코린 15,8-9).

그러나 우리는 그가 위대한 사도이며 선교사이며

순교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진짜로 ‘쓸모없는 종’은 위선자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입니다(마태 23,4; 마태 25,30).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도, 사람들에게도,

그 자신의 구원에도 ‘아무런 쓸모가 없는 자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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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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