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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하경호 쪽지 캡슐 작성일2005-02-18 조회수899 추천수0 반대(0) 신고

 

   어느 성당에 사무장 지원서를 전달하고 문을 나서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우연히 바라본 이 성당의 주보가 '묵주기도의 모후'이기에 도민고가 워낙 외사랑하였던 성모님의 그 마음으로 더우기 지난 6월 암 말기의 통고로 사투를 벌이고 있을 카타리나 형수에 의지하는 그런 마음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윽고 웬지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보다는 잠시 감상파가 되어 가랑비를 접하며 길을 걸어본다. 그랬더니 성 금요일 태어난 하태성 베드로 아들 녀석보다도 때때로 더 귀하게 다가온 내 이름이 착착 달라붙기 시작한다.

 

습관데로 성당에서의 봉송 준비를 위하여 흥얼거리는 살베레지나 속에서 비로소 하하하 경사롭다 호호호로서의 그 두분의 존재감을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여 한층 접착력을 만끽하게 되었고, 잘난척 할 때의 고음 부분이 이때에는 무한정 올라갈 수 있을것 같았다. 

 

그래서 프로들은 세종 문화회관도 마이크 없이 혼자서 지배할 수 있나보다. 아무튼 스치는 남들이 들을세라 그 소리를 죽이기도 하였지만 드디어 성소에서의 봉송이 시간 문제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버스에 몸을 실으니 차창밖에서 대학 후배들이 비추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좀더 함께 그들을 보고 싶었으나 한사람도 오르질 않았다

 

집으로 도착하여 '내안의 너'라는 사람과 담화를 나누려는데 여성들이 특별히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그것과 기인하여 특히나 현대인들이 나처럼 오관을 섬기기에 그 주파수를 맞추어 평화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도중에 이사람도 혹여 종교색으로 내어 몰지 않을까 하여 감성적인 주파수로서 다음과 같이 물어보게 되었다.

 

"만약 님께서 꽃이라 하면 생각해 보시고 말씀해 주시지요..."

 

헌데 그녀는 대뜸 '안개꽃'이라 말한다.

 

안개꽃이라 하면 내가 한때 외사랑하였던, 로사 자매가 마지막 그 순간에 한아름 들고 있었던 그 꽃이 아니었던가? "하경호씨 안개꽃 말을 아시나요?"의 물음에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기에 나중에 알고보니 이 꽃말이 "과거를 잊지 마세요"라는 뜻을 각인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의 나이를 보니 과거의 로사 자매와 같은 그것이었기에 더이상 질문조차 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작동하기도 하였다.

 

비가 퍼붇던 어느날, 육교 밑에서 장시간 이야기 나눌 수 있던 횡재로 인하여 그녀의 하얀 거짓말이 이어짐으로써 사랑과 영혼 개봉관에서 남들보다 세배로 영화를 만끽해 준 그녀와의 사건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365일중 300일이 넘도록 귀가때의 그녀의 아파트를 지나던 어느날은 세상 사람들에게 여흥곡으로 탄생한 윤수일의 아파트라는 곡이 내게는 매우 리얼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의 유일한 자구책으로의 해바라기의 노래를 1집에서 5집까지 듣고 또 들으며 아침이면 귀에서 이어폰을 빼거나, 고등 교과서 컷을 일본사람 부럽지 않게 더 정교하게 그리려던 출판 디자인 시절, 언젠가 횡령 혐의로 감옥에 갇히게 된 자상한 그 전무님으로부터 이어폰에 대한 웃음섞인 핀잔까지 듣던 생활 이후에 아무튼 그녀 로사 덕분에 오늘날의 그레고리오 성가를 누리는 행운조차 이어져 있지만,

 

그것은 돌아보아도 참으로 자랑스럽고도 무거운 만남이었다.

 

군에서 재주가 많기에 삼년동안 하루 세시간 수면 가운데 익혀야 했던 방대한 야근력으로, 더우기 어린시절 아홉때에 영민하신 익명의 신자 아버지를 대신하여 신문을 팔때에 숲속의 거미처럼 진을 치며 신문을 뺏어 보던 어른들에 의하여 자정이 자주 넘던 귀가시에도 반드시 어머니는 대문앞에서 우리 형제를 맞이하였다.

 

작은형 요왕은 당시 유난히도 방범 아저씨를 무서워 하였지만 도민고는 하늘로 막 떠나신 아버지의 그 손길 만큼이나 따듯했던 그 쓰다듬이가 좋았던 시절이 있었고, 당시 신문보다 엄청나게 이익이 남던 푸른색의 비닐 우산을 팔때는 매우 즐겁게 거리를 뛰놀기도 한듯 싶다.

 

지하도에서 쏟아져 나오는 어른들에게 보이지 않는 날개가 돋힌듯 팔리는 우산으로 하여금, 나는 비가 내리는 날이면 작은형 요왕과 함께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이런 내가 군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철저한 메모력이엇던 듯 싶다.

 

하여 어느날, 10미터, 100미터, 1,000미터, 10,000미터로 떠나는 로사의 뒤를 따르는 여정 가운데 사람들이 내리지 않는 한강대교 입구에서 할머니 한분이 내리시기에 내 잣대로 그분을 바라보며 따라 내린적이 있었다.

 

"할머니, 어디 가세요?"라고 묻자 그분은 내 마음을 보시고 너무도 고마워 하시는 표정으로 "총각, 내일이 우리 손녀딸 대학 시험보는 날이라서 요아래로 치성드리러 간다우..."라 대답하셨기에 별뜻없이 다음날 한강도하 도보 행렬을 시작하게 되었다가 그만 셋째날에 이르어 강물이 물침대로 보이게 된것이다.

 

다음날 아침, 습관데로 오와 열이 맞추어진 서제들과 깨끗하게 치워진 하얀 하이그로시 책상위에 진한 흙색 가톨릭 '새 신자 수첩'이 눈에 띠는 것이 아닌가? 하여 메모의 도움으로 더우기 고통이라는 은사에 그대로 그것이 실천으로 이어져 단, 7일만에 아버지 영민하신후 20년동안의 냉담을 벗으려 집 반대방향인 '성모 성심'주보의 응암 성당을 찾게 되었고 조배중이신 정 수녀님은 교황 성하께서 하사하신 묵주를 내 손에 쥐어주셨던 것이다.

 

하지만 침묵 봉헌 주특기인 가톨릭 교형, 자매들의 그것으로 인하여 이 귀한 묵주는 몇년뒤 한바퀴도 돌아보지 못한채 어디론가 분실되기도 하였다.

 

수녀님께선 내가 회두하기 시작한 다음날 미리내의 '천주성삼 성당' 축성미사에 나를 이끌어 주셨기에 또한 나의 등뒤에서 무언가 깊이 간구하시는 모습을 주셨기에 사랑과 영혼의 영화는 그 동전의 양면성 만큼이나 끈임없는 은총으로 흐르기도 하였다.

 

정 수녀님은 엊그제 매괴성지에서 이날 지원서를 제출한 성당 근처로 오시었기에 자주 배알할 수 있겠다는 반가운 마음을 더하고, 그 아련한 추억마저 복기하면서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45년의 여정을 걸어오면서 가장 외로운 일을 기억하노라면 89년 성탄 성야때의 어둠속에 사라지는 정로사 자매와 그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봄이라 할 수 있겠다.

 

선데이 신자도 아닌 다만 로사를 보고 싶은 마음에 이날의 20년데이 신자로서 성당을 찾게 되었는데 이 성당은 현재의 견진 대자인 사베리오의 본당이기도 하다.

 

하지만 콩나물 시루와도 같은 인파속에서 로사는 커녕, 미사의 첫 순배인 제대조차 바라볼 수 없었기에 더우기 나는 그때 이 순배에 대해서도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기에 하느님은 직접 나를 챙겨주시고 있었다.

 

그것은 문득 인파에 휩쓸려 막 성당 문을 나서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왼쪽으로 돌니니, 그 모녀가 눈에 들어왔기에 이로써 가장 커다란 고독의 순간을 맛보게 된 것이었다.

 

아무튼 인간의 비관적 예언은 완전하신 하느님의 그것을 매우 쉽게 앞지르고 적중하기에 충분하였으며 그렇게 그 모녀는 겨울바람의 그것만큼이나 싸늘한 눈빛과 함께 사라져 갔던것이다.

 

이로써 이날로부터 미친듯이 미리내에서 전격적으로 응암본당 대건회 총무로 임용되어 봉사에 참여한 뒤 10년이 흐른 어느날, 마실 오신 어머니와 함께 참례한 미사때에 까맣게 잊혀진 가톨릭 새 신자 수첩의 출처를 밝혀주신 계시 은총은 가장 기쁜 기억으로 다가오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비가 올때면 오늘날의 저 지하도에서 쏟아져 나오는 선교 대상들을 바라보는 은총까지 이어지지 않았던가?

 

이러한 이유로 지난번부터 우연히 절두산 제대위에서 순례객들과 함께 홀로 미사곡 퍼포먼스를 봉송하게 됨도 무관치는 않을 것이다. 절두산 정상에서는 나의 노래가 그대로 메아리로 되어 돌아옴도 위로가 많이 된다.

 

1990년 회두하는데 결정적 디딤돌이 되었던 가톨릭 '새신자 수첩'의 출처는 당시 직장내의 하마리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자매, 정로사의 세 교우중 한사람이 전해 주었을것이라 믿었지만 모두가 모르는 일이라기에 그렇게 까맣게 잊혀져 갔는데, 이후 남북 정상이 악수한 날 미사후 파견때에 그리스도의 계시로써 "너를 이곳에 초대한 이가 로사와 로사의 엄마란다'의 어느 기억 상실 환자의 그 기억을 갈아 치우시도록 '안개꽃'형 계시의 은총을 주신 것이었다.

 

이처럼 하느님을 만나는 첫번째 조건이 '들음'이라지만 이후 나는 더이상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는듯 하다.

 

이날로 부터 처음으로 기도의 문이 열리고, 뒤늦게 묵주를 잃어버렸슴을 알게 되는 가운데 무려 100일동안 아침 가족 기도, 저녁 가족 기도등을 걸음마를 막 땐 아이들과함께, 더우기 도티병원에서 9일간의 수술을 마치고 나온 아내도 동참하였으니 어찌 이들이 주님의 현존을 믿지 않을 수 있었을까?

 

15년이 흐르는 뒤안길에서 성 요셉을 무던히나 닮은 아내 실비아를 만나 이틀만에 전격적으로 결혼하자로 이어진 귀로위에서, 오늘 아들 베드로 녀석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내가 어린시절, 가장과 함께 도시계획으로 빵가게이기도 하였던 보금자리가 헐려 그 보상금으로 받은 전세방 마저 어느 차갑게 눈이 내리는 아침에 길거리에 내 몰려진 가재도구와 함께 가난을 맞이함으로써 이후로부터 33년간 노점상등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셋째 아들의 졸업식 참여를 위하여 처음으로 학교에 오시고는 돈 문제로 선생님 뵙기 민망하여 그랬노라 말씀하시는 이날의 내 눈위에는 운동장 저멀리서 유난히 나를 바라보시는 그모습이 인상적이었기에 아들 녀석의 졸업식을 하루 앞둔밤, 카메라 충전의 은총까지 접할 수 있었는데 녀석은 철없게도 졸업식을 마치고 행방불명이 되어 뒤늦게 친구 아빠를 따라가 신나게 음식을 얻어먹었다며 집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번엔 아들 베드로 녀석이 엄마 아빠가 함께 졸업 구경만 하도록 조장한 것이다.

 

그리고는 한나절이 흘러 직장에서 일하는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이번 성당 사무장 지원건은 24:1의 경쟁률이었는데, 지난번 지원때에는 두번 최종 면접까지 오르기도 하였으나 서류 전형에서 탈락하였다는 통지를 접하게 되었다.

 

역시 씁쓸했지만 로사와의 여정상의 고통에 비하면 지금은 그저 공허하게 다가온다. 아내는 귀가한후 말없이 작업실 문을 열고는 지나간다.

 

그러고 보니 15년간 눈물을 한방울도 흘려보지 못하였는데, 지난번 패션오브크라이스트를 관람할 때 잠시 목까지 그것이 복받쳐 오르기도 하였고, 본당 관리직을 시도할 때 어느날 아침은 잠기어진 조배실 문을 향할 때 잠시 글썽이다 만게 전부인듯 싶다.

 

잠시후 수많은 교형, 자매들과의 침묵이 우선이라는 본당 관리직에 있어 감곡성당 매괴의 정수녀님께 하소연이 이어지기도 하였고...

 

이 관리직이야말로 나의 성소구나!라고 기뻐하던 어느날, 본당에서는 젊은 친구를 가족과 떨어져 성소직에 둘 수 없다는 신부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고, 7년 가까이 미역국을 먹고 살려니 오늘 아침도 그렇게 가랑비가 옷깃을 적시기 시작하였던듯 싶다.

 

당시 신문 한장을 겨우 팔면 2원정도 남았는데 날개돋힌 우산은 무려 10원이 남았었다. 푸른 비닐 우산을 당신께 팔러 여기까지 온 것이다.

 

과연 내가 매일 기도하라는 그분의 말씀을,

 

매일 관대하게 덕행을 실천하라는 그분의 말씀을,

 

매일 관대하게 덕행을 실천하고 기쁘게 포기하라는 그분의 말씀을 얼마나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이렇게 과거의 체험에 젖어 울고 있다.

 

금년 1월 1일에는 난생 처음 대세라는 것을 하였다.

 

천주의 모친 성모마리아 대축일에 이르러 성부께서 성자이신 도민고(도미누스=주님)를 통하여 성모 마리아가 증인 서시고 33세의 성 요셉을 맞이한 것이다.

 

그런데 증인을 서기로 약속된 본당 지휘자의 아내 송마리아씨가 워낙 바쁜 분인지 다른 곳에서 발현(?)하여 급거 아내로 대체가 되었다.

 

사람이 다 같겠으나 뇌의 정중앙 숨골 근처에서 종양이 많이 발생 된다고 한다.

 

환우 손진정 요셉은 세번째 종양 제거의 완만한 수술중에 갑자기 알수 없는 피가 해일처럼 뇌를 채워 죽음을 앞두게 되었다.

 

그는 막 태어나신 아기 예수처럼 그동안의 뇌 순환 장애로 몸이 부었으나 매우 평화롭게 잠자는 그분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33세를 일기로 며칠전 눈 내리는 밤에 영민을 하게 되었다.

 

평신자의 입장으로써 이날의 매우 특별한 조건부 대세를 집전함으로써 독자에게 당부할 이야기가 있다. 본시 대세라 하는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함부로 줘서는 절대 곤란하다.

 

아무튼 나는 그날 아내가 남북 정상이 만난이후 두번째 미사를 궐하게 방관할 정도로 산만한 마음으로 대세를 집전하였는데 잘못된 일이다.

 

오관이 하느님을 만나는 창이기에 오관이 오염되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던가?

 

하지만 나는 다시 믿는다. 자동 대부로써 33세를 일기로 땅에서의 삶을 접은 대자 손요셉의 삶이 서로의 이정표를 닦아 줄것임을 말이다.

 

비록 오라는 곳은 없지만 갈 곳은 많기에 내 마음속의 성전을 허무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나를 거부하는 대 제사장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바리사이파 사람들로 하여금 반드시 반드시 지금의 나처럼 방황 하는자를 대충 넘어가고 바라 보지만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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