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26주일]부산교구 주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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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굿뉴스 | 작성일1998-09-27 | 조회수7,334 | 추천수2 | 반대(0) |
9월 27일 연중 제26주일
복음 : 루가 16,19-31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 집 대문간에는 사람들이 들어다 놓은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 더구나 개들까지 몰려와서그의 종기를 핥았다. 얼마 뒤에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보니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애원하자 아브라함은 ‘얘야,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또한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 고 대답하였다. 그래도 부자는 또 애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소원입니다.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주십시오.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은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부자는 다시‘아브라함 할아버지,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 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하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루가 16,1931)
●얼마 전 내가 참여하고 있는 한 모임에서 주최한 피정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이 피정에서 우리는 과거 가톨릭농민회 전국회장을 맡은 적이 있고 지금은 젊은이 두셋과 함께 농사일에 전념하는 분의 강의를 들었다. 하지만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라기보다는 그분의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강사의 이야기가 끝난 뒤 한 참석자가 질문을 했고 그 질문에 대한 강사의 대답이 있었는데 사건(?)은 이때 일어났다. 강사의 이야기가 좀 길어지자 피정 참석자 가운데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강의가 끝나고 손뼉까지 쳤으면 그만이지, 날씨도 더운데 무슨 이야기를 또그렇게 길게 하느냐?”라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갑자기 자리가 ‘썰렁’해진 것은 물론이다. 다른 볼일로 자리를 비웠다가 나중에 전해 들은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 강사가 사제였다면, 수도자였다면, 대학교수였다면, 내로라 하는 지위의 사람이었다면 감히(?) 그같이 행동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아마도 그냥 일어서서 나가는 정도로 자신의 불만을 표현했을 것이다.` 이 봉변의 주인공이었던 강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학자인 당신 아버님으로부터 어려서부터 공자왈 맹자왈, 옛 성현들의 말씀을 자주 들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버님의 말씀보다 일자무식이었던 어머님의 말씀이 더욱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다라는 것이었다. 옛날에는 다 그랬지만, 그분의 어머니도 불을 때 밥을 지었는데, 젊은 당신이 보기에는 그 모양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장작을 한아름 넣으면 될 일을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조금씩 넣는 모양이 하도 답답해서 한마디하면 혼잣말처럼, “얘야, 사는 게 그런 게 아니란다.” 하시며 당신 일에 열중하시곤 했단다. 이제 육순을 넘기고 보니 그 말씀에 담긴 의미가 새록새록 되새겨진다는 것이었다. 체면치레를 중요하게 여기느라 빚까지 지는 일이 적지 않은 우리 사회이고 보면 되새겨 볼 만한 사건과 말씀이라 생각한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누구의 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말 자체가 담고 있는 참됨에 고개를 숙인다.
1998년 9월 27일 [부산교구 주보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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