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할머니의 내복.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사람은 제 그림자를 보고도 놀라느니 | |||
작성자정은정 | 작성일1998-12-05 | 조회수6,055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할머니의 내복.
친할머니는 제가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시작하자마자 돌아가셨습니다. 시골 큰 댁에 계셨었고, 저는 고작해야 방학때나 제사 때 뵌 분이니, 살가운 정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할머니가 서울 우리집에 머무시면, 비실비실 피해 다니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런 할머니였는데, 돌아가실 때 동네 어른들 눈에서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제 울음은 무척이나 컸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보다, 할머니의 유품들 때문이었죠.
명절이나 생신 때, 받으신 속옷은 비닐이 벗겨지지도 않은 채, 그대로 차곡차곡 쌓여 있고 늘 입고 계셨던 내복은 이미 나들나들해져서 천을 몇 번이 덧 대은 헌 옷이었죠.
집성촌이라 동네 사람들이 모두 친척인데, 우리 할머니한테 내복 한 벌 안얻어 입은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형제가 모두 다섯 명이니 한 벌 씩만 받아도 많다며, 그 속옷을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작 당신께선 그렇게 낡은 속옷을 입고 지내신 거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두 사도를 세상으로 파견하면서, 많은 능력들을 선사하십니다. 물론 그 권능들을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쓰도록 하고, 가서 하느님 나라의 임박을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곤 이런 당부도 놓치지 않으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오늘 이 말씀이 저의 생활을 돌이키게 합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거저' 주고 받는 삶, 내가 이렇게 해주면 너도 이렇게 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 아니라, '거저' 실행하는 삶. 그것은 예수님의 삶이였나 봅니다.
우리 할머니께서도 거저 주고, 받는 삶을 사신 듯 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 낡은 속옷을 입으시고 눈을 감으셨지만, 또한 예수라는 한 사나이의 이름 조차 알지 못하신 분이지만, 할머니의 속옷은 예수님 것과 똑같은 것임을 알았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