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기도 중에 부르는 하느님의 호칭 | |||
---|---|---|---|---|
이전글 | [들으며] 주일의 독서와 복음말씀 | |||
다음글 | 좋아하는 성서구절 | |||
작성자신영미 | 작성일1999-01-17 | 조회수4,711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기도 할 때 하느님을 어떻게 부르는가에 따라 지금 내게 느껴지는 하느님상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칭 할 수도 좋으신 하느님, 구원자, 사랑이 많으신 하느님 등등 사람들이 하느님의 상을 그릴 때 하느님의 힘이나 하느님의 전능함이나 정의 하느님은 쉽게 연상하면서 하느님이 사랑의 하느님이라든가 친근하고 좋은 분으로는 그리기 어렵다. 내 삶을 뒤돌아 보아도 내 삶에 모든 힘겨운을 하느님이 부재로 하느님의 섭리에 불개입으로 생각 했을 때는 도저히 그런 분으로 그릴 수 없었다. 그렇지만 묵상 중에 하느님 상이 바뀌면서 그렇게 바뀔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욕을 하든 찬미를 드리든 두려움에 떨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내가 아는 만큼의 시도는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 솔직히 나중에 회개 했지만 내가 가장 용서할 수 없었던 분이 하느님 이였고 내가 가장 심하게 비난 했던 분도 하느님 였으며 나는 당신을 신뢰할 수 없다고 선언했던 대상도 하느님 이였다. 육체적인 타락을 할 수 없었기에 정신적으로 하느님에게 복수하고 싶었고 주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만큼 큰 복수는 없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그 역시 신뢰의 한 방법 이였음을 하느님께 돌아와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원망이나 감사마저도 그분이 받아 주시고 보고 계시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사도 중 토마의 대한 감상은 별 감흥이 없었는데 요한복음의 부활한 뒤에 토마와 예수님이 만남을 묵상하면 할수록 이분이야 말로 대단한 용기에 소유자임을 묵상 할 때 마다 알 수 있다. 정통적인 해석은 그분이 이성적이라서 의심이 많아서라는 것으로 나와 있지만 내 개인의 해석은 조금 다르다 그분은 너무나 사랑이 많았기에 자신이 믿었던 주님을 확실이 알고 있기에 부활한 예수님 이전에 십자가 상에 주님을 알고 있었기에 기껏이 그 두 분이 같은 분임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부활만 했다고 해서 그냥 믿는 버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그 상처를 승화한 주님을 믿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 마음을 잘 알고 계시기에 확인할 길을 주신 것이고 "너는 보고야 믿느냐" 그 말씀은 질책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조금은 웃으시면서 "너는 보고야 믿느냐?"하는 정감어린 느낌으로 읽을 수도 있다. 자신이 기도 중에 하느님을 어떻게 부르는지 묵상해 봅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