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다웟과 음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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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신영미 | 작성일1999-02-28 | 조회수4,352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다웟을 음악을 사랑했다 아삽과 함께 시편에 대부분의 노래를 지었고 사울이 하느님이 떠나신 후 악령에 시달렸을 때 그의 심령을 안정 있게 해 주기 위해 비파를 타 주던 소년도 다웟 이였고 그는 주님을 찬미 하며 노래하고 춤 추기 좋아 헀다. 작곡가에 생애가 어떠 했든지 클래식 음악에 20세기 전 대부분 곡이 교회 음악이다. 또한 그리스도교를 비롯해 모든 종교는 음악으로 자기들의 神을 믿는 바를 나타내었다. 사물엔 리듬이 있고 그 리듬을 읽을 줄 아는 것이 음악가 겠지. 영화 '아마데우스' 에서 살리에르는 자신에게 음악의 진면목을 들을 줄 아는 귀는 주셨으면서 그 음악을 작곡할 능력을 주지 않은 하느님을 모짜르트처럼 방탕하고 쓸모없이 보내는 사람에게 음악적 재능을 준 하느님을 버린다. (실제 살리에르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작품상에 인물성격) 많은 사람들이 그에 심정을 이해 하고 공감 한다고 했지만 사실 음악을 진면목을 들을 수 있는 기회 있다는 것이 어디인가? 들을 수 있고 비평할 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인데 쟝르를 구별하지 않고 하느님을 거부하는 모든 소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거부한데서 시작한다. 나는 그것을 원했는데 하느님은 그것을 주시지 않았다고 하나 그들은 하느님의 요구를 들어 주며 살았는가 하느님의 요구를 알아 가려고 노력 했는가 너무 힘든 것만을 요구한다고 하나 그들이 하느님께 원하는 것들도 하느님이 우리들에게 주고자 하는 것들과 다르다 더 정확이 말해서 나는 요구 해도 되도 하느님은 하느님이니깐 요구할 수 없다고 된다는 식 하느님은 우리에게 요구할 만한 당연한 권리가 있으시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청하고 계신다.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이란 책이 있다. 거기서도 언급되는 말이나 언제나 너무하고 잔인한 것은 우리들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보냈으나 우리는 그 아들을 죽였다. 음악을 들으면서 늘 생각 하지만 내가 저 음악을 연주 할 수 없다는 것이 슬프다 여기기 보다는 저란 아름다움을 들을 수 있고 그 아름다움을 느낄 감수성이 있고 즐길 수 있는 시간과 맘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싶고 그래야 한다는 것 음악가가 어떤 의도로 음악을 만들었던지 난 그 음악에 내 마음을 담아 기도로 승화시켜 하느님과 함께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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