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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사악 부자를 통한 福의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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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신영미 쪽지 캡슐 작성일1999-03-19 조회수3,932 추천수8 반대(0) 신고

이사악의 아들 형제 야곱과 에사오 그 둘의 복의 대한 태도

그리고 그 성취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내용이다.

성서에서는 형제나 혹은 자매들의 암투내지 경쟁을 자주 보게 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이 형제일 것이다.

이사악을 두고 정점에 이르게 된 이들 형제의 복의 대한 쟁취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묵상하게 된다.

그 전에 미리 말해 둘 것은 성서는 보는 관점에 따라

신앙심에 유무와 깊이와 상관 없이 많은 해셕과 느낌이 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성서 해석이 중요한 것이고

성서를 이해하는 것은 좋은데 잘못된 주석은 안 되는 것이다.

 

이 묵상은 그래서 어디까지나 본인의 것이지 교회에 입장과는 상관 없다는 것을 밝혀 둔다.

에사오와 야곱의 대해서 한 영성가들은

야곱을 신앙인.영성가,관상하는 쪽으로 보고

반대로 보통의 신학자 일반인은 야곱을 남의 복을 가로채고 기회주의자이며

처세술이 밝았던 사람으로 묘사를 한다.

그 진의 여부는 하느님이 알겟지만

야곱이 그렇게 그려 진다면 에사오의 대한 평이 어떻게 나오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신중하지 못한 사람. 기회를 잡지 못하는 이, 신앙이 없는 사람, 활동가로 묘사 된다.

불행한 형이라고....

하느님이 그 모든 결론을 내리셨고 난 판단할 권리가 없으므로 뭐라고 결정할 수 없지만

한가지 이사악이 복을 빌어주는 장면에 대해서 묵상한 것은 있다.

이사악은 자신이 늙어 가고 있음을 알았을 때 더 이상 정신을 잃게 전에

에사오를 축복 해 주고 싶어 한다.

성서에 나와 있는대로 그는 에사오를 사랑했고 에사오가 안된 것을 알며

그 집안 특유의 미래를 느끼는 능력으로 (그들은 그런 면이 있다)

자신이 지금 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낀다.

그래 아들 에사오에게 사냥을 가서 음식을 만들어 오면 그것을 먹고

정성을 다해 복을 빌어 주리라 말한다.

그는 근데 그렇지 못했다.

그가 축복한 것은 큰 아들인 에사오가 아니라 작은 아들 야곱이다.

그는 처음엔 에사오가 아니라고 의심을 한다. 목소리가 다르다고

한데 그 다음 팔을 더듬어 보더니 축복을 빌어 준다.

사람의 신분이 팔이나 목소리 하나 갖고 판정 될 수 있을까?

나라는 사람은 목소리나 몸에 붙어 있는 털로 좌우 되지 않는다고 본다.

또 이사악은 야곱을 에사오라고 믿으며 복을 빌어 주었다.

내가 하느님께 지향을 갖고 기도했다면 절에서 했든

길거리에서 했든 그 기도는 하느님에게 갈 것이다.

부처님 앞에서 했다고 부처님에게 가지는 않을 것이다.

한데 복을 받은 것은 야곱이다.

즉 이사악은 처음부터 그가 에사오가 아닌 야곱인 줄 안게 아니였을까?

그는 하느님이 자신의 사랑하는 에사오보다 야곱을 맘에 들어 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것에 불안을 느껴 그는 자신이 죽기 전에 복이라도 그 아들에게 주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나 그가 복을 빌려 줄 찰나의 들어 온 것은 야곱이였다.

그렇기에 그는 에사오가 다시 들어 왔을 떄 그에게 복을 빌어 주지 않는다.

복이란 그가 능력이 있어서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을 내려 줄 분을 믿어 그것을 비는 것이다.

주문이나 무슨 형태를 갖고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형테를 갖고 일정한 효염이 있는 거라면

한계가 있고 주술적인 것이 되고 마는데 하느님이 그럴 분이 아니다.

즉 야곱을 축복해 주었다고 해서 에사오를 축복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야곱은 자신의 임종에 자리에서 어떻게 12먕의 아들과 손자에게

복을 빌어 줄 수 있겠는가?

자신의 한몫이 한 그들 형제에게 준 것보다 많았다?

그렇지 않다. 유다는 이스라엘 민족을 품고 있지 않았는가?

즉 복을 빌어주는 행위는 그 비는 대상인 하느님의 뜻 없이는 불가능한 것

결론적으로 복은 그 빌어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하느님과 얼만큼 관련이 있고 알아 듣고 받아 드렸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해 별 짓을 다하고 우상도 섬기지만

그것이 설령 잘 되어도 그것은 원래부터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일이거나

뜻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지 그 비는 대상의 힘이 있거나 가치가 있어서는 아니다.

늘 사람의 생각을 깨는 주님이시고 마음을 새롭게 하기를 바라는 주님 이시다.

또한 하느님이 에사오를 자신의 뜻을 이룰 겨레의 선조로 삼지 않았을 뿐

그에게 충분한 재산과 땅을 주셨다.

즉 자기 몫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청했을 때만이

하느님의 뜻은 거침없이 이루어진다.

막혀도 뜻은 이루어 질 것이나 능동적인 동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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