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을 찬미하라(시1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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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지형 | 작성일1999-04-17 | 조회수3,712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라. 내 안의 모든 것들아,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 찬미하라. 103,1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내시고 자애와 자비로 네게 관을 씌우시는 분. 그분께서 네 한평생을* 복으로 채워주시어 네 젊음이 독수리처럼 새로워지는도다. 103,3-5
찬미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본래 누구 앞에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혹은 그의 주인됨을 표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는다라는 뜻이다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결국 주님을 찬미하다라는 이야기는 자신의 삶에 드러난, 혹은 공동체의 역사와 자연 속에 드러난 하느님을 알아 뵙고 그분의 엄위하심을 깨닫는 다는 것을 달리 이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물 안 개구리가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발견하고 끝없이 보이는 호수를 발견하는 순간 그냥 자신이 살아 왔던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깨닫으며 동시에 감탄의 소리와 더불어 무한한 자유와 가능성에 기뻐 뛰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즉 우리가 스스로 전부라고 여기는 그 어떤 세상, 즉 우리의 머리 속에 인식되어온 세상의 힘과 모습 속에서 살다가 어느날 그 모든 사건들과 역사, 존재의 깊이 깊이에 스며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그 하느님 앞에 우리의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찬미인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터져 나오는 찬미의 소리 그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엄위하심을, 그분의 다스리심을 인정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진정한 무릎꿇음인 것이다. 그것은 자유이다. 그 자유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같은 자유에로, 같은 찬미에로, 같은 발견과 깨달음으로 초대하게 된다.
그러면 이 시인이 발견한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인가? 그분은 바로 용서하시고, 낫게 하시며 구원하시어 네 한 평생을 가득 채워 주셔서 온전한 만족을 주시는 하느님이신 것이다. 그것은 거꾸로 뒤집어보면, 시인은 죄를 경험했으며, 또한 아픔을 겪었고, 절망과 죽음 속에 내팽개졌던 적이 있으며, 한없는 갈증을 느꼈던 깊은 체험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모든 삶의 구비구비를 지나면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외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런 분이라고!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이 발견한 하느님, 아니 본래부터 그렇게 계시며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계실 하느님께 온 세상이 무릎꿇을 것을, 즉 그분을 찬미할 것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깊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결코 시인은 지금 그야말로 한평생을 하느님께서 채워주신 복으로 편안하게 산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는 오히려 삶의 모든 고통 속에서 참으로 그를 일으켜 세워서 그를 독수리처럼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 시편 103과....를 덧붙였습니다. 첨부파일: Psalm103.hwp(131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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