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자신을 드러내시는 주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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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신영미 | 작성일1999-05-29 | 조회수4,208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앤소니 드 맬로 신부님의 저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 보면 이냐시오식 상상으로 드리는 묵상 방밥을 소개하고 있는데 즉 여러 장소 어느 시간을 정하고 하느니을 초대하고 하느님의 반응을 보고 내 반응을 보고 말을 건네고 답을 들을 후 처음 느낌과 어떻게 다르가 묵상해 보는 것이다. 그 원전텍스트로는 성서를 많이 이용한다. 그것을 처음 해 보았을 때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릴 수 없었다. 영화에서 봤던 모습이나 얼굴을 없는 희미한 모습 느낌으로 저 모습이 예수님이다 하는 것만 정한 채 묵상과 기도를 하다가 요즈음엔 가끔 영화와 상관 없는 예수님도 보게 되는데 그런 묵상을 하면서 내가 그떄마다 좌절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은 날 언제나 답을 갖고 게시고 언제나 현존하시며 날 언제나 원하시면서 내가 찾기 전부터 날 찾고 있는 이라는 내가 그분의 드러냄을 바라기 전부터 그분이 자신을 내개 내어 주서고 싶어 한다는 것을 믿어서 이다. 명동성당 뒷편에 안아 미사참례를 한 적이 있다. 아주 후미진 곳이라 스피커 잘 된 곳이기에 미사집전하는 사제의 소리는 들을 수 있어도 목소리 이외는 모습도 제대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 그곳에서 미사가 집전 되는 것은 사실 이였고 볼 수 없다고 해도 그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난 거기에 있었단 것이다. 사실 철학적 논거에서 본다면 하느님이 절대로 없다고 할 수도 없고 절대로 있다고 할 수도 없다. 왜 그것은 마음 안에서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에 살면서 하느님이 계심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없다고 생각하며 찾는 과정은 비슷하고 텍스트도 비슷하다. 그러나 무엇을 믿고 안 믿고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것처럼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모험이지만 충분이 그 모험의 위험부담을 감 수 한다면 하느님의 현존을 맛 볼 수 있다. 처음엔 잘 되지 않던 이냐시오식 북상법이 잘 되는 것을 체험한 후 그 과정을 묵상한 뒤에 나온 글이라서 이런 말을 쓰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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