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살아계신 하느님께 청하기]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사랑하는 방법] | |||
작성자박선환 | 작성일1999-06-01 | 조회수3,469 | 추천수11 | 반대(0) 신고 |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살아계신 하느님께 청하기 토비 3,1-11a.16-17a; 마르 12,18-27
우리들이 열심히 기도를 하다가도 불현듯 하느님을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말씀을 들어 주실까? 하느님이 이 말씀을 알아들으실까?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등등 기도 안에서 일어나는 잡념의 종류도 참 가지가지다. 분명한 것은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께서는 분명 살아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들이 소망하는 것을 우리들보다 먼저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이런 것에 관해서 복음서는 [하느님께서는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마르 1,27)이시라고 표현하고 있다. 내가 봉헌하는 살아 있는 기도를 들으시고 나에게 응답해 주시는 하느님을 향해서 우리들은 과연 나의 입장만을 고집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지 모르겠다.
오늘 읽은 토비트서에는 두 사람의 기도가 나온다. 우선 토비트의 기도는 자신과 공동체의 잘못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반성의 내용이다. 천재지변이라면 천재지변이랄까 토비트는 뜨거운 여름날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낸 뒤 집안 담 밑에서 잠을 자다가 눈 위에 참새의 뜨거운 똥이 떨어져서 순식간에 시력을 잃고 말았다. 그 괴로움은 동네 사람들의 빈정거림부터 냉소에 찬 아내의 조롱에 이르기까지 토비트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았다. 기도 가운데 그가 표현하듯이 [사는 것보다 오히려 죽는 것이 낫다](토비 3,6 참조)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죽는 것보다는 살아 있는 것이 오히려 하느님께서 자신을 외면하는 처사라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토비트는 당치않은 조롱과 짓누르는 슬픔에도 불구하고 자신 고통에 대한 하소연과 바람을 하느님께 기도 드리는 의연함을 보 여주고 있다.
한편 사라라는 여자는 일곱 번씩이나 결혼을 했지만 그 때마다 남편들이 죽는 기이한 운명을 타고났었다. 우리 나라에서 이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서방 잡아먹는 년]이라는 욕을 얻어먹으며 쫓겨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라의 경우에는 심지어 여종마저도 주인을 업신여기며 [당신도 남편들을 따라 죽어 버리시오](토비 3,9) 라며 엄한 말을 서슴지 않는다. 사라는 몹시 슬퍼서 순간적으로 자살을 결심했다가 뉘우치고 [나 스스로 목을 매는 것보다 주님께 간구하여 내 목숨을 거두어 가시도록 하는 편이 낫겠다](토비 3,10 참조)며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다.
토비트의 경우나 사라의 경우나 모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불행이 닥쳐서 스스로도 몹시 슬펐지만 주변의 사람들로부터도 적지 않은 괴롭힘을 당하는 극도의 고통 중이었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처리하지 않고 모든 것을 오로지 하느님께 맡겨 드리려는 믿음이 결국에는 그들을 구원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 성서는 [그들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도달하였고, 하느님께서는 라파엘 천사를 보내시어 그들의 고민을 풀어 주게 하셨다](토비 3,16∼17)고 전해준다.
[하느님을 온전히 믿는다, 하느님께 순명한다]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하면서도, [적어도 내 뜻은 이렇습니다]며 자신을 고집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나와 함께 머무시는 주님께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주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고백할 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아멘.
선환 생각^^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