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무슨 기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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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선환 | 작성일1999-06-15 | 조회수2,781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무슨 기도? 2고린 8,1-9; 마태 5,43-48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과연 하느님이시로구나' 라고 감탄할 정도의 가르침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범인이 생각 못할 행동의 지침이기 때문이 더욱 그렇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가르치신 바를 죽음에까지 이르 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철저하게 지키셨기에 무게와 힘이 더하여졌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가르침을 듣는 우리들에게는 '이제부터는 아무도 원수가 될 수 가 없다'는 이 말씀에 부담을 갖습니다. 원수마저도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킨다면 아무도 원수될 일이 없을 텐데 우리들은 왜 이 말씀에 커다란 부담을 갖게 됩니 까? 아마도 우리들의 입장에서 원수를 만들지 말아야 된다는 것, 아무도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이 불가능하게만 생각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사제의 입장이지만 우리 신자들에게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길 수 있 다는 점에 동의하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도 서로가 원수 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하시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 다. [원수로 삼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표현을 억지로 끼워 맞추면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어려운 고민이 있다며 상담을 할 때, 폭력을 행사하고, 칼을 들 고 휘두르는 정말 미운 남편을 위해서 내가 어떤 기도를 해야하겠느냐고 물을 땐 무슨 답변을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미워 하는 감정을 누그러트릴 수가 없다는 하소연 앞에 꺼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궁여지책으로 미워하지 않으려고 어떤 노력 을 기울여보았는지에 대해서 묻고, 그런 계획들이 처음부터 일목요연하게 준비되 고 실행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맥 빠지는' 대답만을 들려줄 수 있을 뿐이었습니 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들었던 예수님의 새 가르침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받 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원수 를 미워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일차적으로 이웃이 란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민족은 제외가 되지만, 예외적인 규정으로 혈통은 같지 않더라도 같은 땅에 거주하고 있는 이방 인들도 포함되었다는 점은 발전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 엘 백성이 갖는 특권과 계명은 그들 가운데 살고 있는 정착민들에게도 거의 똑같 이 해당되었습니다. 이렇게 구약에서도 [이웃]의 범위는 상당히 넓은 것이었습니 다. 이웃의 행복을 바라고 선을 행하라는, 법을 초월하는 진실되고 자비로운 사 랑이 명령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 결코 포함되어서는 안 될 대상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원수, 이스라엘의 적국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 땅과 이스 라엘 백성을 하느님과 한 가지로 보았기 때문에, 땅과 백성을 공격하는 세력에 대한 합법적인 증오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에서는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에 있어서 [원수는 미워하라]는 말로 쉽게 해석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웃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약과는 다르게 전개됩니다. [원 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어제 복음에서 읽었듯이(마태 5,38-42)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개념이 하늘 나라에서는 더 이상 통용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당한 만큼 상대방에게 해준다]는 사고방식은 깨뜨려져야 하며, 이제 국민과 국가의 삶 에 있어서 <친구와 적을 구별하는 것도 제거되어야 한다>는 놀라운 변화를 요구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 [원수]라고 하는 관념은 더 이상 존재해 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 앞에서 갈등을 느끼는 부분이 바로 여기 에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리를 시기하거나 미워하는 사람들, 악의를 가진 이웃이 나 사업상의 경쟁자들을 연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살아 계실 동안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당하신 것과 똑같은 적대와 중상을 받았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증오와 혐오로 대적해서도 안 되며 증오의 벽을 두껍게 해서도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임무는 증오보다 훨씬 더 큰 <사랑으로> 미움을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 한 가지를 덧붙이십니다. 기도란 특별히 우호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만을 위해서 바쳐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기 도란 편견이 없고 관대한 것이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모든 적대자를 포함해야 한 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이천 년의 역사 안에서 이 길은 폭력을 쓰지 않고 겸손과 사랑으로 쟁취한 승리를 안겨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기도문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관대한 마음으로 살아가려는 의 지를 담은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너그럽지 못한 나의 부 족함을 주님께서 채워주시라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 한 기도는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며, 참된 그리스 도교 정신의 가장 성숙한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열매를 마음속으로 확 신하면서 행동할 때 우리는 상상보다 훌륭한 수확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선환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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