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8월20일 독서 복음묵상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8월21일 독서 복음묵상 | |||
작성자조한구 | 작성일1999-08-18 | 조회수2,693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8월 20일 금요일 성베르나르도 아바스 학자 기념일
독서묵상 오늘 독서는 가난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어버린 여인은 이스라엘에서는 쉽게 거지와 같은 신분에 떨어질 수가 있었답니다. 나오미라는 여인이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진 거이지요. 남편을 따라 모압으로 와서 살았던 나오미는 며느리를 모두 모압 여인으로 얻었던 모양입니다. 두 아들 마저 잃고 생계수단이 막막했던 나오미는 두 며느리보고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는데요, 룻은 끝까지 남아 시어머니 나오미를 봉양하였답니다. 룻은 이방인 여인이었지만, 시어머니의 겨레를 자신의 겨레로 받아들이고, 시어머니가 모시는 신을 자신의 신으로 모셨지요.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오게 되었는데요. 베들레헴에 딱히 땅이 있거나 재산이 있어서가 아니었답니다. 베들레험은 나오미가 모압으로 떠나기 전에 살았던 고향이었기 때문이었는데요. 베들레험에서 와서도 롯은 보리이삭을 주어서 나오미를 공양하였답니다.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는 이방인 롯은 단지 시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 베틀레헴까지 왔는데요. 과연 롯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느님 자비의 손길이 과연 이방인 여인의 가련한 인생에도 손을 내밀었을까요? 신기하게도 롯은 예수님의 족보까지 등장하는 여인이 되었는데요. 롯은 보아즈와 결혼하여 다윗왕의 할아버지를 낳았기 때문이지요. 인생의 짧은 토막만 본다면 과부 나오미와 롯의 인생은 가련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비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돌보아주실 뿐만 아니라, 한 왕족의 가문을 이끌어 내시기까지 하셨답니다. 나오미와 룻의 사이좋은 고부관계를 보면서, 우리 주변의 고부관계를 되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복음묵상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원한 화두입니다. 이 화두는 무엇이 하느님 사랑이고 이웃 사랑일까?로부터 시작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묻게 하는데요. 우리의 머리는 그것을 말을 해도 우리의 행동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별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 그것은 우리들은 너와 나, 하느님과 자연, 하느님과 이웃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이분적인 사고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지만 깨달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우리의 이분적인 사고를 부정하는데요. 우주 만물의 아름다움과 신비 속에 하느님을 감추고 있고, 자연이 아프게 되면 결국 나 자신이 아프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과 자연과 우리 자신들은 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따라서 자연을 학대하고 이웃을 박해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학대하는 것이고, 나 자신을 박해하는 거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당장 자신의 눈에 보이는 이익과 자신의 부를 원하기 때문에, 또 다른 자기인 자연을 파괴하고 이웃의 몫을 착취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는 예물과 제사를 바치는 것으로 하느님 사랑을 실천했다고 여기고,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고 여기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보다 근본적인 우리 자신들의 삶의 변혁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과 자연과 사람은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존중받고 사랑 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자연과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이고, 이웃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자신의 권리와 인격을 존중하는 것처럼, 이웃의 인권을 존중하고,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 자선을 베푸는 것에 우선하는 데요. 이웃의 정당한 몫을 이웃에게 돌리고, 그리고 이웃의 불행과 아픔을 이심전심으로 느끼며 자신의 아픔처럼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사랑 아닐까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절대 절명의 계명 앞에서, 우리는 그 동안 자연과 이웃을 어떻게 대우했나를 반성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은 사회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오늘도 함께 하소서 예수님, 당신은 우리에게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이 우리에 앞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당신은 자연과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을 보셨고, 또한 그 속에서 당신의 모습을 보셨기 때문이었을까요, 당신은 풀 한 포기, 물 한 모금, 가랑잎 하나, 개미 한 마리도 소중하게 다루셨던 것 같습니다. 자연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릴 하느님의 품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 당신은 아무리 미천한 사람들이라도 그들을 소중하게 받아들이셨고, 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셨지요. 마침내는 원수까지 사랑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서로 미워하고 다투는 원수조차도 근원에 가서는 하느님 안에서 모두 한 몸이기 때문이셨나요. 예수님, 저희들은 아직도 자연을 개발을 빙자한 이익을 확대하는 수단으로 취급합니다. 나 보다 힘이 약한 이웃은 이용하거나 혹은 자선을 베풀 대상으로 취급하고요. 그러기 보다 예수님, 저희들이 사람, 자연 이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가 아프게 되면 모두가 함께 병들게 되는 한 몸으로 말입니다. 예수님, 저희들이 내세를 위한 사랑보다는 지금 여기서 자연과 사람을 내 몸같이 존중하고 사랑함으로서 하느님 나라의 사랑 안에 머물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