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까만 약과 흰 약의 믿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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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글 | [연중21주간]8월24일 복음묵상 | |||
작성자박선환 | 작성일1999-08-21 | 조회수2,973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연중 제21주일 <까만 약 하얀 약의 믿음> 이사 22,19-23; 로마 11,33-36; 마태 16,13-20
안녕하십니까?
견딜 수 없는 무더위와 쏟아 붓는 폭우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여름이 거의 지나
간 듯 여겨집니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이 이제 그런 기후가 한풀 꺾
였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좋은 계절에는 믿음의
생활에도 좀더 마음을 기울여서 여러분 모두의 가슴속에 하느님께 대한 진솔한
믿음과 사랑이 좀더 짙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연중 제21주일입니다.
오늘 복음 안에서 우리들은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대한 그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라는 고백이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고백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복 있는 사람](17절)으로
선포하시며, [그를 반석으로 삼아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약속](18절)도 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분명하고 똑똑한 믿음의 고백과 이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약속은 부르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꼭 알고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역학 관계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의 경험입니다. 6주간의 신병 훈련을 마치고 3년 동안 생활
할 자대에 배치를 받았는데 약 20 여 명의 고참들과 한 내무반에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고참들이 자대 생활의 여러 가지 규칙과 규율들을 교육시켰는데,
예를 들면 부대의 간부들 이름이 무엇인지, 고참들의 서열이 무엇인지, 복장은
어떻게 갖추고 경례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근무를 설 때의 수칙은 무엇이고,
다른 부대원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지내야 하는지, 식사와 청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이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의무대에 관한 것이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의무대를 [돌팔이] 라고 부르면서 웬만하면 그 곳엔 가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이었습니다.
3년간의 군 생활을 통해서 몇 차례의 의무대 이용을 통해서 체감한 바로는 그
때 고참들의 말이 백 번 옳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부대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약이 소위 [깜장 약과 흰 약]이었는데, 배가 아파도 [깜장 약과
흰 약], 머리가 아파도 [깜장 약과 흰 약], 염증이 생겨도 [깜장 약과 흰 약]으
로 모두 같은 처방을 내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오랜 부대 생활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고참들은 차라리 의무대에 가는 것보다는 참는 편이 낫다는
교육을 시켰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신병들 가운데는 달라진 환경 때문인지 여기 저기가 아파서
의무대에 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소위 돌팔이 의무대원의 처방을 받고 머리 아픈 것도 낫고, 배
아픈 것도 낫고, 염증도 가라앉는 경우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대할 무렵
비슷한 연배의 의무대원으로부터 약의 처방은 약효보다는 심리적인 치료인
경우가 더 많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곧 치료를 받는 사람이 가진,
그 약을 먹으면 꼭 나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병의 치료를 촉진시켰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들의
마음과 믿음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고 불안해지기도 합니
다. 베드로 사도의 고백이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사도단을 대표하는 신앙의
고백이었다면, 오늘날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 믿음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우리들은 과연 우리들이 고백하는 대로 주님께 대한
믿음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 것이지요.
어느 누군가가 이성에 대해서 호기심이 생기게 되면 그와의 관계를 더욱 깊이
발전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영어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처음에는 좋아합니다(Like)-사랑합니다(Love)-필요합니다(Need)의
관계로 발전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상대방이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여겨질 때 두 이성은 서로를 일생을 함께할 반려자,
배우자로 선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선배들이 말하기를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랑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말해줍니다.
감정이라는 것은 극히 제약적이어서 오랜 시간이 지난다든지, 관계가 이전보다
느슨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처음의 그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요청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에게 [나 믿지?] 라는 물음을
던지게 되고, 적어도 그 관계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상대방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지요.
주님과 우리 신앙인과의 관계도 이와 비슷한 발전의 관계를 갖는다고 생각됩니
다. 단순한 관심에서 시작되지만, 아니 계셔서는 안될 존재로서 확인이 되고,
끝으로는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 생겨나지 아니하고서는 믿음의 생활을
지속해 나갈 수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사랑도 변하고
믿음도 사라질 수 있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분, 당신의
약속을 번복하지 않는 분이시기에 우리들이 믿기만 한다면 그 믿음에 상응하는
선물을 주시는 분이심을 점점 더 깊이 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이 [믿음]을 저는 [받아들임의 신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깊
이 믿고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도무지 둘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생겨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은 믿음에 상응하는 여러 가지 행위들을 통해서 구체화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진실한 행동을 하
고, 진솔한 말을 하게 되고, 사랑의 행위를 보이게되고, 상대를 받아들이거나
따르게 되고, 더 깊이 알고 싶다는 관심이 생겨나고, 결국에는 이런 모든
행위를 통해서 [아! 우리가 서로 굳게 믿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그 시간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생생하게 눈앞에 살아 계심을
믿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며, 당신을 통해서 우리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가 틀림없으십니다] 라는 구체적인 신앙의 고백인 셈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들 앞에 오셔서 [당신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라
고 물으신다면 우리들은 어떤 대답을 들려드릴 수가 있을까요? 베드로가 비록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거듭 모른다고 말했고, 불어오는 거센 바람 앞에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잠시나마 잃어버렸었다 하더라도 다시금 예수님께 돌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믿음이 약한 우리들도 주님 앞에서 비록 더듬거리는 서투른
고백일지언정 [주님을 믿습니다] 라는 분명한 고백과 함께, 믿음에 상응하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들의 신앙을 드러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멘.
선환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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