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1주간 수요일(8월 2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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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창열 | 작성일1999-08-25 | 조회수2,83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연중 제 21 주간 수요일 (1데살 2,9-13 : 마태 23,27-32) 위선에 대한 책망
이스라엘에서는 길가에 있는 공동 묘지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길 바로 옆에 묘지가 들어서 있지요. 유대인들은 그 사이를 지나가다가 무덤에 몸이 닿으면 불결하게 되어 기도나 예배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민수 19,11의 말씀대로 "어떤 사람의 시체이든 시체에 몸이 닿으면 칠일간 부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특히 유대인들의 3대 명절 때에는 많은 순례객들로 붐볐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떠밀리어 어느 무덤에라도 몸이 닿으면 불결하게 되어 축제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길가에 있는 모든 무덤에 회칠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햇빛이 밝게 비치면 무덤이 하얗게 빛나 보였는데, 멀리서 보면 아름답게까지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사실상 썩어 가는 뼈와 시체로 가득 차 있지요.
예수님은 이런 예를 들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의 위선을 책망하시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외면적인 행동은 참으로 경건하고 보기에는 좋지만, 그들의 내면적인 마음 자세는 부패한 죄로 가득 차 있다고 질책하신 것입니다. 경건한 겉모습이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찬 내면적인 상태를 은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처럼 그럴싸한 겉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쓴다하더라도 가식과 허위는 들추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 떳떳하지도 못하고 사람들 앞에서도 의인으로 통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의 위선을 새로운 각도에서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과거에 살았던 의인과 예언자들의 신앙에 참여하는 뜻에서, 그리고 예언자들이 당했던 박해를 보속하는 의미에서 기념관과 같은 무덤을 단장하고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보존해야 할 것은 단장된 무덤이나 기념비가 아니라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선포한 하느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언자들을 본받기는커녕 위선적인 행동으로 예언자들을 박해하던 조상들과 한 패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이 그 당시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옹호하기보다는 박해자들의 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완고하게 굳어 있었고, 이것은 바로 자기 조상들이 사형에 처했던 예언자들을 영적으로 다시 죽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3-43)를 통해서 바로 이런 태도를 고발하셨던 것입니다.
겉은 말짱하지만 속이 썩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양복이 신사를 만들어 주지는 못합니다. 율법의 정신보다 율법의 문자만을 지키는데 몰두하는 사람은 겉으로는 신심 있는 자로 보일지 몰라도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놓쳐 버릴 수가 있습니다. 이런 위험성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모든 계명의 근본 정신은 ’사랑’입니다. 마음 속 깊이 사랑을 간직하며 행하는 신심이야말로 하느님께 아름답게 비춰질 것이며 사람들에게도 의롭게 보여질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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