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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8월30일 독서 복음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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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한구 쪽지 캡슐 작성일1999-08-27 조회수2,629 추천수1 반대(0) 신고
기쁜 소식. 밝은 세상

8월 30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독서묵상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죽은 사람의 부활에 관해서 묘사합니다.

죽은 사람의 부활에 관한 바오로의 의견은 구약의 에제키엘과 다니엘서에 입각한 것인데요.

죽은 사람의 부활에 대해서 최초로 기록한 에제키엘서에는 죽음의 계곡에서 마른 뼈들이 일어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요,

다니엘서는 아담의 아들이 최후의 심판이 끝난 뒤, 구름을 타고 내려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는 묵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기록이 유다인들의 부활에 대한 의견을 지배했는데요.

바오로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바오로는 이 두 가지의 의견을 눈앞에서 보듯이 사실적으로 그려주고 있는데요.

먼저 하늘에서 명령이 떨어지고, 대천사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게 됩니다.

그러면 믿다가 죽었던 사람들이 먼저 부활하게 될 것이고,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여 올려져 주님을 만나게 될거라고 합니다.

바오로는 이런 일이 자신의 세대에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요.

바오로의 이러한 의견을 고대 지중해 사회의 우주관에 입각한 것인데요.

천체 물리학의 발달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우주가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과 같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습니다.

바오로의 이야기도 신화적인 상상의 세계에 입각된 것임을 알고 있지요.

그러면 우리들은 최후의 심판과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에서 무엇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아마 우리는 이 이야기들에서 죽은 자와 산자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적인 지배로 알아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절대적인 지배는 최후의 심판 후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예수님의 의견에 우리의 의견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복음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당신의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자신의 사명을 선포하는 이야기와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선포하신 사명에 대한 이야기부터 살펴보며는요,

예수님의 사명은 은총의 해, 즉 희년의 선포에 있습니다.

빚의 탕감과 묶여있는 자들의 해방과 억눌려 있는 자들의 자유와 어둠에 갇혀 있는 자들의 깨어남이 희년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데요.

유다인들에게 이런 세상은 하느님 나라에서나 가능한 꿈의 세상이었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희년의 선포, 즉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지금 그 일이 여기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시는데요.

그러면 예수님 자신은 희년의 선포자가 되시고, 하느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다니엘서의 아담의 아들이 되신다는 말씀이됩니다.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희년 선포에 나자렛 사람들은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를 잘 알려 주는데요.

그 말뜻은 사회적으로 낮은 예수님의 신분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미천한 그가 어떻게 구세주가 될 수 있겠느냐는 비꼬임이 들어 있습니다.

아마 이러한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고향사람들과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판단을 했고, 예수님을 고향에서 쫓아 냈던 것 같습니다.

주로 바오로 사도를 따라다니면서 이방인 지역의 공동체를 위해서 복음서를 쓴 루가 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받는 이야기를 통해 다음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당신의 백성을 찾아 왔지만, 백성들은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했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쫓겨났듯이,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님이 제 갈 길을 가셨듯이, 제 갈 길을 찾아 이방인지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오늘도 함께 하소서

예수님, 당신의 고향 사람들은 왜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아마 당신의 고향사람들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당신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 고집된 편견은 당신의 출생 신분과 직업, 당신의 가족들에 관한 정보정도였지요.

그 정도로도 당신의 고향 사람들은 당신을 안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그 고집에 사로잡혀 당신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놓치고 말았답니다.

예수님, 당신의 백성인 유다인들은 왜 당신을 배척하였을까요?

정확하게 말하면, 유다인 지도자들은 왜 당신을 배척하고, 후기 유대인들은 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배척하였을까요?

예수님, 우리들은 당신이 가난한 사람들과 서민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당신이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듣고 희망과 힘을 얻었었지요.

하지만 안다고 하는 사람들과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지금까지 알고 믿어 왔던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의견과 당신의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었지요.

그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집되고 습관 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 혹시 저희들이 아직까지 당신을 만나 뵙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 이유가 아닐까요.

저희들이 교리 속에, 신앙 고백문 속에 들어 있는 당신의 모습만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 빚을 탕감이 이루어지는 자리에서,

억눌린 자들과 민족이 해방되고,

감옥에 갇힌 자들이 풀려나고,

하느님 나라의 심오한 진리가 열리는 그 곳에서 저희들이 당신을 만나 뵙게 하여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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