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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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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선환 쪽지 캡슐 작성일1999-09-04 조회수2,193 추천수2 반대(0) 신고

                          연중 제23주일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에제 33,7-9; 로마 13,8-10; 마태 18,15-20

 

 

 제1독서인 에제키엘서의 말씀은 고유한 인격을 지녔으면서도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 존재의 특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잘못을 했다면 잘못을

 

저지른 그 개인의 책임이겠지만,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잘못된 길로 가는 것

 

을 방치했을 경우 그것에 대한 책임은 공동체가 함께 져야한다는 경고의 말씀이

 

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뉘앙스를 담아서 사도 바오로도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남에

 

게 해야할 의무를 다하라](로마 13,8)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소극적인 의미에서

 

는 의무를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지만, 좀더 적극적으로는 [사랑의 의무를

 

다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의무는 끝이 없어서 [아무리 해

 

도 다 할 수 없는 의무](8절)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되짚어 생각하면 하

 

느님께서 우리를 끝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전제할 때, 우리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어느 한계를 정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반성해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은 독서에서 밝힌 두 가지 사실들을 종합해서 형제들과 맺을 수 있

 

는 여러 가지 관계 가운데서 서로 잘못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잘 한 일은 격려해

 

주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공통된 부분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많아서 함께

 

일을 하거나, 함께 살아야 하는 경우에 있어서 어려움이 생겨날 때도 많습니다.

 

이 때문에 나는 A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B라고 잘못 전달된 경우도 생겨

 

나게 되고, 이러기도 저러기도 어려운 난감한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했을

 

때 오는 중압감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걱정해야 하는 경우에 더 커지게

 

마련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서는 잘못한 일에 대해서 서로가 충고해줄 책임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항상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때로는 소위 [본의 아니게] 잘못하게 되는 경우들도 생겨납니다. 순간적으로

 

감정에 휩싸여서 이성을 잃게 된다든지, 마시던 술을 못 이겨서 실수를 하게 되

 

는 경우들이 여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감정을 컨트롤하기 힘들어서

 

나중에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이 화근이 돼서,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게 되는 경우도 생겨납니다. 한국말을 잘 모르는 외국인도 아니면서

 

[미안하다] 혹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어떻게 말해야할지를 몰라서 공

 

연히 빙빙 말을 돌리며 엉뚱한 말을 하는 사이에 시간이 지나가 버릴 때도 생겨

 

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평소에 말

 

을 잘 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충고해 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평소에 좋

 

은 행동을 연습해 둠으로써 정말 그와 같은 말과 행동이 필요할 때 유용하게 사

 

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정 사실에 대해서 자주 화를 내게 되는

 

사람이라면 그와 비슷한 경우가 다시 찾아올 때 대처할 본인 나름대로의 준비를

 

갖추는 일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순간적인 감정을 조절하면서 화를 내지도

 

않고 상대방의 기분도 배려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고, 여러 번 연습하면서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다시 그와 같은 상황이 찾아올 때 실제로 적용해 보려고

 

노력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갖고 있는 대인관계에서의 어려움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① (학생)

 

 어떤 친구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그 친구와의 우정을 생각하자니 양심이 허

 

락지 않고, 양심만을 따지자니 친구를 잃게 되는 경우(어떤 클럽에 가입하기 위

 

해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용기를 보여줘야 할 때, 친구와 비슷해지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비도덕적인 언사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경우).

 

 ② (일반인)

 

 부부간에 - 뭔가 한 마디를 하고 싶은데, 공연히 긁어 부스럼이 될까봐 속만

 

태우는 경우(과음, 늦은 귀가, 처가에 대한 남편의 태도 등).

 

 고부간에 - 얘기를 안 하자니 가슴이 답답하고, 얘기를 하자니 간섭하는 것 같

 

은 경우, 시어머니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살림을 하고 싶은데 되지 않는 경우.

 

 

 그런데 분명한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그것이 사회의 관습과 도덕과 종교적인

 

신념과 비교해서 잘못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는 편이 그렇지 않는 편보다 훨씬 낫다는 지적입니다. 물론 차라리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사태의 발전을 막을 수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로 인해서

 

어느 한 쪽이 전혀 참을 수 없는 상태로 발전된다면 그런 상황보다 곤란한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점은 [자신의 가치관이 세상의 모든 가치관을 절대

 

적으로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여유 있는 마음을 갖는 일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복음에서도 잘못한 사람에 대해서 처음에는 개인적인 충고를 시작하

 

게 되지만, 듣지 않을 경우에 두 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려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개인적인 가치와 노력이

 

절대적일 수는 없기 때문에 2차, 3차 단계로의 이행이 필요한 것인데, 반드시 두

 

세 사람의 도움을 받을 것,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와 교회의 정신,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반성함으로써 모르는 사이에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당신의 언행에 잘못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일이 쉬운 일

 

은 분명 아닙니다. 공연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마른하늘 아래서 뺨 맞는 웃지 못

 

할 일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 나오는

 

마지막 충고, 곧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

 

다](마태 18,20)는 말씀에 힘입어, 항상 주님의 뜻 안에서 해답을 구하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 속에서 이와 같은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과정은 복잡하고 힘들겠지만, 진실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끝없는 노력 속에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체험하고, 감사드리며 살아갈 수 있

 

을 것입니다. 아멘.

 

 

                                                      선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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