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용서해야 하는 이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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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창열 | 작성일1999-09-12 | 조회수2,778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연중 제 24 주일 (집회 27,30-28,7 : 로마 14,7-9 : 마태 18,21-35) 용서해야 하는 이유
오늘 말씀의 주제는 용서와 자비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보통 두세 번 용서하면 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일곱 번 용서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베드로는 스승 예수님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에 대한 마음의 폭이 넓어졌나 봅니다. 그래서 두세 번 용서하는 유대인들에 비해서 용서의 횟수를 더 늘려 잡았습니다. 성서에서 일곱이란 숫자는 완전수이며 끝내주는 수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나무라지 않고 베드로의 말을 시인하고 더 강조하시면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이요 무한정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에 횟수를 정해둘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웃의 잘못을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한다 해도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는 못 미칠 것입니다.
오늘 제 1 독서의 집회서에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라... 자기 이웃에 대해서 분노를 품고 있는 자가 어떻게 주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으랴? 자기도 죄짓는 사람이 남에게 원한을 품는다면 누가 그를 용서해 주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너무나 잘못하고 있는 남편 때문에 이혼을 결심하면서 남편이 잘못한 것들을 일일이 노트에 적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도 얼마간 잘못한 느낌이 들어 자기 잘못도 노트에 써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잘못한 것은 노트 두 쪽이었는데, 자기 잘못은 노트 세 쪽에 가득 차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잘못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남편이 잘못이 쉽게 용서되었다고 합니다.
용서하기 어려운 것은 상대방의 잘못에 더 큰 비중을 두기 때문이 아닐까? 또 자기가 받은 상처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하느님을 닮으려면 먼저 용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용서는 신적 사랑’인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을 되새겨봅시다. 일만 달란트나 되는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종이 고작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무자비하게 다룹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무자비한 종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면 갚겠다고 하는데도,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는 처사가 눈꼴사납기만 합니다. 실로 용서하지 못하고 용서하기를 주저하고 어려워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한 달란트가 6천 데나리온이니까, 일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입니다. 6천만 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164년 걸립니다. 80년 살아도 3대가 벌어야 하는 돈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계산기를 두드려보니까 에러가 납니다. 하루 일당을 5만원으로 치면, 3천억 원입니다. 동료가 빚진 돈은 백 데나리온이니까 고작 50만원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께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를 상기시키면서 보잘것없는 다른 사람의 빚을 받으려고 무자비하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기가 어려운 것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고작 백 달란트의 빚을 탕감하려고 하지 않는 완고함 때문이 아닐까요?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자비요 상처받은 자신을 사랑하는 치유법입니다.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미움과 증오심을 갖게 되면, 그로 인해 더 큰 상처만 생겨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합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도 [평화의 기도]에서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 비유의 결론도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으로부터 평생 갚을 수 없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 줘야 하는 빚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미 받은 하느님의 용서도 언제나 유보된 채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용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힘으로 완전히 용서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자기를 죽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 2 독서의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용서를 받아 자유로운 신분을 되찾은 것처럼, 참으로 자유로워지려면 죽기까지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미움과 증오심이 끝없이 따라다닙니다.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서도 미움과 증오의 마음을 품고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용서가 없었다면 벌써 그분의 심판을 받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매순간마다 우리의 용서를 청하는 마음과 회개의 마음을 보시어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고 화해의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는 은총을 입고 있기에, 우리들도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서 조건 없이 용서하는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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