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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녀 소화 데레사의 삶과 영성(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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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창열 쪽지 캡슐 작성일1999-09-30 조회수7,175 추천수9 반대(0) 신고

포교 사업의 수호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학자 대축일

[성녀 소화 데레사의 삶과 영성]

 

   [임종 직전, 성녀의 모습]

오늘 10월 1일은 우리의 사랑스런 아기 데레사 성녀 축일입니다. 우리가 흔히 소화(小花) 또는 [작은 데레사]라고도 부르는 데레사 마르땡은 1873년 프랑스에서 다섯 자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열심한 신자였기에 딸만 다섯인 것을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섯 딸들을 모두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그 중에 방문회 수녀가 된 레오니아를 제외한 4명은(마리아, 뽈리나, 세레나, 데레사) 모두 같은 리지외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갔습니다. 데레사는 막내였지만 넷째 언니 세레나보다 먼저 가르멜 수녀가 되었지요. 하느님께 대한 열정이 지극하였기에 입회 적령기를 기다릴 수 없어 15세에 수녀원에 입회했던 것입니다. 데레사는 입회를 위한 교황의 특별 허락을 청하러 로마까지 가는 열의와 적극성을 보였습니다.

 

 데레사의 자서전인 [한 영혼의 이야기]에서 "명오가 열린 3세 이후부터 한 번도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일찍부터 하느님 일에 뛰어난 감각을 갖고 있었는데요. 그녀는 마치 복음서에서 "한 농부가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돌아가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듯이"(마태 13,44), 이 세상에서 진정 가치로운 것이 무엇인가를 예민한 영적 감수성으로 깨달았으며, 그것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명확히 알았던 것입니다. 데레사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가르멜 수녀가 되었지만 그의 영적 수준은 이미 높은 경지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무미건조하고 고독한 가르멜 봉쇄 안에서 오직 하느님께로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쳐나갔던 것입니다.

 

 데레사는 위대한 성인들이 걸어간 길로는 자신과 같은 작은 영혼은 갈 수 없음을 알아채고 하느님 안에서 보다 작아지는 완덕의 지름길인 [어린이의 길]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무능과 나약을 슬퍼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하느님의 손안에 작은 자가 되어 하느님께서 친히 완덕의 정상에 올려 주시도록 하는 [사랑의 엘리베이터]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녀는 평소에 늘 "자신이 걸어간 길은 누구든지 올 수 있고, 특히 작은 영혼들이 따라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는데요. 그러기에 "어떠한 황홀한 환시보다 단조로운 숨은 희생의 생활을 더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데레사의 [어린이의 길]을 이끄는 수레바퀴는 겸손과 신뢰, 그리고 사랑입니다. 데레사는 끊임없이 자신을 잊도록 노력했으며,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람으로 여김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거듭거듭 탈출했습니다. 그녀는 누구보다 자의식이 강하고 쉽게 상처받는 감수성이 예민한 성격이었기에 자신이 하찮은 사람으로 취급되는 것을 기뻐하는 데는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데레사는 가르멜의 지독한 추위와 병약한 몸, 신앙 없이는 버텨가기 힘든 봉쇄 생활 속에서 자매들에게 잊혀가고, 말년에는 병으로 인해 공동체의 짐이 되는 수모까지 겸손하고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녀의 희생과 사랑의 생활은 동료 수녀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평범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언니 셋이 같은 가르멜에 있어 인간적인 위로를 그녀가 받았으리라 생각되겠지만 현실은 그와 반대였지요. 데레사는 언니들이 섭섭하게 여길 정도로 육친의 정에 기대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며, 언니들로 인해 본의 아닌 상처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종신서원을 하고도 어른들 공동체(꼬미노떼)에 내려오지 못했으며 수녀원 내에서 선거권도 없었습니다.

 

 데레사는 언제나 자신의 본성을 거슬러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하려 했는데요. 예를 들면, 자신에게 늘 싫은 짓을 하고 공동체 안에서 자주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한 동료 수녀가 있었는데, 데레사는 그 수녀가 저쪽에서 오면 되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싫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수녀를 누구보다 사랑하려고 애썼고, 그 수녀가 기뻐할 일을 찾아 했지요. 언니들이 자신들보다 그 수녀를 더 좋아한다고 오해할 정도로 감쪽같이 이 싫은 감정을 극복했는데, 데레사는 이것이 무척 힘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수녀원에서 괴팍하기로 소문난 할머니 수녀의 식탁 시중을 자청하여 미소로써 봉사했습니다. 이 때는 이미 데레사의 병이 깊은 상태였으나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감추고 이런 애덕 실천을 했던 것이지요. 데레사가 늘 평온하고 미소짓는 표정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병이 심한 상태임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녀의 언니들까지도...

 

 데레사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잊혀지기를 원했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조차 잊혀지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상대적으로 그녀의 기도생활은 매우 건조하고 메말랐습니다. 임종을 앞둔 시기에는 신앙을 위협받을 정도의 큰 메마름을 견뎌야 했지요. 그러나 이렇듯 내적 건조함 속에서도 끊임없이 하느님께 사랑을 바치는 희생과 애덕을 실천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그녀의 위대한 점입니다. 자신 안에 쉬고 계시는 하느님을 깨우지 않고 그분의 발아래 작은 희생과 사랑의 꽃잎을 뿌렸던 데레사의 일생은 바로 피 흘림 없는 순교였습니다. 이 얼마나 용사의 신앙, 자신을 불사르는 큰사랑입니까?

 

 전교에 대한 열망이 누구보다 강했던 그녀는 세계 곳곳을 다니며 하느님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고자 열망했는데, 이는 봉쇄 수녀원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기도와 사랑 안에서 그 길을 찾았습니다. 그녀는 사제와 선교사들을 위해 희생과 사랑을 바쳤으며, 교회의 심장이 되어 영혼의 구원을 위해 누구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데레사는 "천국에 가서도 쉬지 않고 세상 끝날 때까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일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녀를 성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와 함께 [전교의 주보]로 삼은 것이지요.

 

 데레사는 15세에 가르멜에 입회하여 24세에 폐결핵으로 선종하는(1897년) 짧은 생애 속에서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알고, 그것을 향해 일초도 낭비함 없이 완덕에로 매진해 나간 하느님의 지혜로운 아이, 흐트러짐 없는 온전한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데레사는 우리들 평범한 신자들이 따라갈 수 있는 완덕의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나약을 슬퍼하기 보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사랑하고 자신을 낮추는 어린이의 겸손과 신뢰를 배우고, 이웃 안에서 애덕을 실천하는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도 데레사 성녀의 [작은 자]의 대열에 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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