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젊은이들이 평화의 길을...(11/18복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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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우진 | 작성일1999-11-18 | 조회수2,274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루가19,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시는 모습과 평화의 길을 끝내 보지못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내려질 준엄한 심판을 경고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세지는 무엇일까? 나는 내가 처했있는 현 상황 안에서(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젊은이와 생활) 이 복음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눈물어린 마음을 체험할 때가 많다. 내가 젊은이들을 바라볼 때와 하느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리라고 생각할 때 말이다.
14-26세의 연령 층을 이루는 120여명의 젊은이들이 나의 식구다.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분위기는 늘 소외와 무관심의 분위기였고 처벌과 내몰림이 그 댓가였다. 그래서 그들의 표현대로 그들은 "아무 생각이 없는 아이들"이었던 것이고 지금도 나는 그런 모습을 가끔 그들 안에서 발견한다. 얼마나 안타깝던지! 타일러보고, 참아주고, 겁도 주어보지만 그들은 요지 부동일때가 많다. 아니 소위 말해서 "그때 뿐이다!" 언제까지 이것을 반복해야 할지 내 자신에게 물어볼 때도, 하느님께 불어볼 때도 참 많다. 그들이 참된 삶의 길을 알게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약하지만 사제로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은 "사제란 특히 젊은이들을 위한 사제란 진정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끊임없이 나와 주변으로 부터 오는 도전에 대한 응답의 연속이다. 물론 때론 쓰러지기도... 같이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이해해주지 못하고 판단하는 나의 모습, 따뜻한 말과 태도,즉 미소어린 얼굴 표정과는 거리가 먼 경직되고 어른스러움만을 고집하는 나의 모습, 젊은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에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서 합리화시키며 그 순간을 피하며 도망하는 나의 모습! 이 모든 모습들이 하느님께서 나의 모습을 보며 "네가 정말 평화의 길을 걸으면 얼마나 좋을까! 너는 아직 그 길을 보지 못하는 것 같다!"라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사목이라고 하는 것이 하느님의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그 의지를 세상에 중재해주는 것이라 한다면 나라고 하는 사람은 바로 그 구원을 가난하고 소외된 젊은이들에게 중재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고 성소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바로 알퐁소 리구리오 성인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는 것, 즉"온유한 마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이 "평화의 길을 걸어가기를" "진리를 향해 걸어가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하느님의 온유와 사랑어린 그들에게 다가가는, 즉 사목적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자체가 나 자신이 평화의 길을, 구원으로 향하는 길을 걷는 것이리라. 현실적 논리, 부정적 관점의 세상에 속한 논리로 볼때 조금은 바보스럽게 보이기도 하고 어리숙해 보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세상을 보시고 눈물어린 한탄과 심판의 경고를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여라"(마태 5,1)라고 말씀하시며 활짝 웃으시리라. 만일 그렇지 않다면 분명 그 "심판의 날"은.... 좋은 하루 되소서!
* 날짜를 혼동하여 18일과 19일이 뒤바뀌었음을 사과드리면서 정정합니다. 미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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