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랑의 매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12월30일(성탄8부, 제6일째) | |||
작성자김종연 | 작성일1999-12-23 | 조회수2,001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성탄절이 되면 부각되는 인물이 바로 요한이다. 그의 인생은 오로지 한 사람을 기다리며 그 사람을 위해 길을 닦아 놓는 역할이었다. 그도 제자가 있었고 존경을 받던 인물이다. 사람들은 그가 메시아인가 여겨질 정도였다. 교만한 마음이 들 법도 한데 그는 겸손히 자신은 길을 닦는 자이며 뒤에 오실 분을 위함이라 주저 없이 말한다. 더욱이 그는 자신은 더욱 작아져야 하며 그분은 더욱 커져야 한다고 말한다. 뒤에 오실 분이 편안하게 오실 수 있도록 길을 닦는다는 것은 닦는 이는 고되고 힘든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지를 손에 묻히고 땀을 흘려야 한다. 더러운 것을 치워야 한다. 그래서 요한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고 회개를 하도록 외치는 이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했듯이 이런 요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는 이도 있었지만 양심에 찔려서 그를 오히려 죽이려고 하는 무리도 있었다. 하지만 숱한 핍박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것을 치우고 진리를 알리는 그의 역할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찍이 이땅에 요한보다 큰 인물은 없다고 하셨다. 성경의 인물들은 다 존경하고 신앙의 표본으로 삼을 만 하지만 정말 요한과 같은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은 드물다. 사막의 숫사자라고나 할까. 그는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리라.
이 세기말에 요한이 다시 나타난다면 어떨까. 그 시대의 존경보다는 그저 정신나간 사람으로 취급당하지 않았을까.
갈수록 기성 세대와 신세대간의 세대차가 심해졌다. 부모는 오로지 자식을 위해 고생하시고 그 번돈은 고스란히 자식을 주고 자식은 그것도 모르고 돈만 펑펑 쓴다. 자식들은 고마운지 모르고 부모에게 손벌리는 것만 익숙해지고 말이 안통한다고 무시한다. 말이 통하는 친구들만 찾고 다닌다. 하지만 그 생각은 해봤을까. 나를 위해서 죽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친구들이 아니라 바로 내 부모님이라는 것을… 하지만 나 역시 다를 바 없음에 서글프다. 부모님한테 미안한 줄 알면서도 의지하는 버릇이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이 기성세대와 신세대간의 갈등은 바로 부모들의 잘못된 사랑에서 나온다. 내 자식 귀한 줄만 알았지 매를 들어서 바로 잡을 생각을 못해서이다. 많이 맞은 자식이 효도를 한다는 말이 있다. 나도 걱정이다. 내 자식 이쁘게만 여기지 잘못하면 우는 것이 불쌍해서 야단도 제대로 치지 못한다. 하지만 자식을 위한다면 그 눈물이 그 값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매번 이론과 실제가 다른 내 자신이 한심스러울 때가 있다.
"엘리야가 어른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 자식들의 마음을 어른들에게 돌려 화목하게 하리라"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본다는 것, 부모 자식간 처럼 그것이 절실한 관계가 있을까. 하느님이 그런면까지 신경을 써주신 것이다.
사랑의 반대말이 무관심이듯이 잘못하는 줄 알면서 지적을 해주지 않는 것도 역시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사실 싫은 소리하면 그 사람이 혹 나를 나쁘게 볼까봐 아니면 사이가 안좋아질까봐 그저 넘기는 수가 많지 않은가. 목숨을 걸면서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던 요한과 같은 인물이 지금 이 시대에 절실하다.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우리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 외칠 수밖에 없었던 요한! 그 마음에 다시 한번 나를 뒤돌아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