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이방인에 대한 두가지 교훈을 보여주신다.
솔로몬의 경우, 주님이신 야훼의 신임을 얻어 만천하에 뛰어난 지혜를
알리면서 이스라엘을 번영시켰으며 찬송을 받았다.
하지만 교만함이 싹텄으리라.
지혜가 주님에게서 옴을 잊고 자신의 능력으로 여겼으리라.
그 찰라에 화려한 이방인들의 신들이 눈에 들어왔으리라.
교만은 솔로몬의 눈을 멀게 하여 속을 보지 못하고 겉에서만 드러나는
화려함에 이방인들의 신을 주님의 성전에 끌어들이는 큰 과오를 저지르고
만다.
그 벌로 주님은 이스라엘이 멸망하리라고 저주하신다.
그 반면에 이방인인 여인이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매달린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며 애원한다.
그 여인은 자신의 신에게도 그렇게 매달렸으리라.
하지만 공허함만 있었을 것이다.
그 여인은 주님이 누구신지 무엇을 전하러 오셨는지 잘 몰랐으리라.
단지, 예수님의 눈에서 그 분이 자신을 도울 수 있는 분이라는 걸 읽었으리라.
구원은 진리를 듣고 경험하여 얻을 수도 있지만 극한 상황에선 단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의 얼굴만 보아도 깨달을 수 있다.
진실과 가식이 없는 아무런 꾸밈이 없는 눈으로 보면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방인인가 아닌가가 아닌 위선과 꾸밈을 벗어던졌는가
아닌가이다.
나를 벗고 주님앞에 섰는가 아니면 철저히 무장하고 좋게 보이려고 하는 것인가.
주님은 뼛속 깊이 우리를 들여다 보시는 분이시다.
냉정해 보이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여인에게 '너는 내가 다른 이방인들이 모시는
신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인정하느냐? 너의 이방인 신이 줄 수 없는 것을 내가
해낼 수 있다고 믿느냐?' 확인해 보이시는 것이다.
은총은 그것을 주시는 이의 능력을 믿어야만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그 능력을 주시는 이가 주님이심을 잊었고 이방인 여인은 그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하늘 나라가 과연 누구의 것이겠는가.
그리스도인과 이방인의 차이는 국적에 있지 않고 그 믿음과 구원을 주시는 분을
알아보는 눈에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신에게 다시 묻는다.
일의 해결책을 주님에게서 찾는가 아니면 세상 이득에서 찾고 있는가.
나는 과연 주님의 자식인가 아니면 이방인인가.
그 중간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주님을 위해 식탁 밑에서 웅크리고 있는 강아지가 되어봐야 되지 않을까.
그 강아지는 적어도 어디서 좋은 것이 나오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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