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제 1주일 강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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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황인찬 | 작성일2000-03-07 | 조회수2,956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사순제1주일 강론 죄를 지어도 기쁘게 살자
사순절이 시작이 되었다. 성탄절의 화려했던 축하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슬픔과 보속의 때이다. 제주도로부터 꽃이 피었다는 화사한 봄날씨인데, 이때부터 우리들은 사순절이기 때문에 우리 삶의 어두운 부분이고 생각하고 싶지않은 죄에 대해서 강론을 해야한다는 것이 슬프다. 평소에는 복음적 신앙생활 즉 죄를 지어도 기쁘게 살라고 가르쳤다면 죄를 회개하고 보속하라고 강조해도 괜찮겠지만, 신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러면 예수님이 복음말씀에서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이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스도교의 핵심사상인 복음은 주님의 부활 소식이다. 그래서 삶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치 그 삶이 전부인양 체념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인간의 삶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짓는 죄의 무게 보다는 용서의 은총이 더 크다는 것이 복음적인 삶인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아담과 그 후손들이 지은 모든 죄가 ’복된 탓’(beata culpa)이라고 찬미하였다. 죄가 없었으면 하느님의 구원계획 자체가 없었을 것이므로 은총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 예수님은 용서받은 죄많은 여자(루가 7,36-50)에서 오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과 오십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이 똑같이 채권자로부터 빚을 탕감받았을 때,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 더 고마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자신에게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 죄많은 여자야 말로 가장 큰 은총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고, 많이 용서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는 이 말씀은 우리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뜨려준다. 죄를 지은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래서 스스로 하느님을 멀리하고 하느님도 자신들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바오로 사도는 "올바른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로마 3,10)고 한탄했지만 우리의 삶을 뒤돌아 보면 사실이다.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니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헤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절망하며 산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러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우리가 성서나 교리가 가르치는 본래의 뜻을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죽음을 이긴 부활과 죄를 넘어선 용서의 은총이 가득차 있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사라지고, 율법주의에 빠진 형식적 종교생활만이 어느새 우리 교회 안에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 말씀 중에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는 구절에서 사순절이 되면 한결같이 모든 강론이 죄의 회개에 초점을 두면 잘못된 생각이다. 여기서 회개할 수 있게 된 동기는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하느님이 구원계획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실현되었으니 이제 그만 자신 안에서 스스로 절망하며 삶을 굴레 속에서 아귀다툼을 하며 지내는 이들에게 이전의 낡은 삶과 사고방식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희망 속에서 다시 일어나라는 복음이다. 이 때문에 사순절은 은혜의 때이며 옛 사람들은 천국문이 열려있어서 이 시기에 죽으면 곧장 천국에 간다고 생각했었다.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마음이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삶이 결정된다. 즉 절대적인 죄인도 없고 절대적인 의인도 없다. 살아가면서 절실하게 느끼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짓는 죄와 선행을 저울로 달아본다면 아마도 거의 같은 무게를 나타낼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순간 순간 선이냐 악이냐에 대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우리의 삶이 때로 악으로 기울어질 수도 있고, 선으로 기울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 맞는 말인 것 같다도 한다. 그러니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절대적인 죄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절대적인 의인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이원론적인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지나쳐서 죄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복음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선포하신 회개하라는 말씀은 지금 죄의 길을 선택한 사람에게는 그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으니 믿음과 희망을 갖고 선의 길로 돌아서라는 권고이며, 이미 선을 향한 삶을 출발한 사람에게는 순간적인 실수로 죄를 지었을지라도 좌절하지 말고 더욱 굳센 희망과 믿음을 갖고 다시 일어서라는 격려인 것이다.
다음 글은 98년 봄에 원주MBC에 밤의 명상원고로 써 보냈던 한 부분이다.
"뜰 앞에서 베드로가 스승이신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일생의 모든 것을 바쳐 예수를 따라다녔지만 맥없이 잡혀가 고문을 받는 것을 본 베드로는 스승에게 실망을 느낍니다. 그래서 몰래 숨어서 마음 졸이며 구경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당신도 이 사람의 제자들 중 하나가 아닙니까?"(요한 18,17.25.26)하고 세번이나 물었지만 모두 다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제자였던 "요한의 아들 시몬, 당신은 이들보다 더 나를 사랑합니까?"(15.16.17)하고 세번이나 물어보시는 성서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읽노라면 대제관 성서에서나 일반적으로 3이라는 숫자는 완벽함을 의미합니다. 우주 안에서도 하늘 땅 그리고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이 세분이시라는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합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세 번 스승이신 예수를 배반했다는 복음이나,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가 베드로에게 당신에게 대한 사랑을 확인하시는 것은 매우 중요한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완전히 배반했었지만 다시 홰개하고 완전히 사랑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나는 베드로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비교하면서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제품을 앞두고 정말 순백의 영혼을 간직하겠다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지내던 부제반 때였습니다. 한 번은 신학생 때 어떤 동료에게 심한 잘못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웃으면서 받아넘길 수 있는 농담이 그날은 귀에 거슬리게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는 안되지만 나는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고 욕까지 하였습니다. 곧 동창생에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었지만 문제는 내 자신에 대해서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마음을 못 다스려서 어떻게 사제가 될 수 있겠느냐는 절망감으로 온 세상이 어둡게 느껴졌습니다. 한 동안 고민하다가 고백신부님을 찾아갔더니 베드로와 유다에 대해서 묵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가리옷 유다와 베드로는 똑같이 스승을 배반하였던 제자들입니다. 나는 은전 서른 양에 팔아먹은 죄가 오히려 베드로처럼 완벽하게 부인한 죄보다 더 가벼울지도 모른다고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인정하고서도 용서를 구하지 않고 절망한 나머지 자살해 버림으로써 자신의 죄를 주님이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과 절망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시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사도로서 충성을 다하다가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유명한 ’쿼바디스’라는 영화에서처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당함으로써 주님을 향한 자신의 믿음과 사랑을 입증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베드로는 오늘날까지 세인들에게 예수님의 수제자로 일대 교황으로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묵상을 통해서 나는 주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 사랑을 갖고 다시 용기를 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예 신앙생활 자체를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태도는 하느님의 은총이 없어도 스스로 죄를 짓지 않고 능히 살아갈 수 있다는 지극히 교만스런 모습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은 해야하지만 죄를 지어도 주님께로 달려가서 용서를 청할 때 그 축복은 얼마나 큰지를 아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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