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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황인찬 | 작성일2000-04-15 | 조회수3,211 | 추천수20 | 반대(0) 신고 |
성지주일 강론(2000년) 갈등과 번민하는 삶
지난 몇주일 동안 코알레르기와 감기로 제정신을 가지고 살지 못하다가 오늘 아침부터 본래의 위치로 돌아온 것 같다. 매일 아침마다 달리기를 하거나 테니스를 신나게 쳐야 하루가 힘차게 시작된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난 참으로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다. 왜냐하면 지난 한 달동안 감기와 코 알레르기로 찌뿌둥한 날씨처럼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나는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었다. 특히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산좋고 물 맑은 이곳에서 깨끗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살면서도 언제부터인지 몸이 약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원인이 무엇인지 반성하게 되었다
나는 사제가 되면 가족도 거느리지 않으니 돈벌 욕심도 사라지고 오로지 하느님만 바라보며 사는 그야말로 순수하고 거룩한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를 했다. 하지만 사제가 되고 나서 가지고 있던 순수한 열정은 알게 모르게 사라지고 인간적인 욕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게 되었다. 선후배 사제들의 모습을 보면서 동료 사제들의 삶을 보면서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했는데 어느새 질투와 시기 그리고 인간적인 성공을 향한 욕심이 내 안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맑고 순백처럼 깨끗한 영혼이 검붉은 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의 정신은 온갖 욕심으로 서서히 혼란스러워져가고 있었고 드디어 육체의 병까지 얻고 말았다. 그래서 매년 맞이하는 봄이지만 올 해는 예년 보다 더욱 코 알레르기로 고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내가 살아온 삶이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몸에 저항력이 떨어진 원인은 바로 외부에서 기인되지 않고 내 안에서부터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니 좀 나아진 듯 하여 아침 운동을 하고 주말을 맞이하여 내일 강론 준비하는 것 보다 우선 그동안 내 몸처럼 어지럽혀진 사제관을 우선 정리 정돈하기 시작했다. 구석 구석 쌓인 먼지를 털어내면서 내 안의 욕망을 씻어버리고, 늘 같은 자리에 있던 것도 이리 저리 옮겨보면서 무엇인가에 집착하던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사제관 청소로 표현해 보았다.
벌써 사순절 막바지인 성주간을 맞이하여 나의 신앙생활을 재점검해 보니, 나는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내 뜻을 따르고 있었고,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내 일을 위해서 살면서도 편안하게 아무 갈등도 하지 않으려고 했던 지난 삶이 발견된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인지 아닌지 잠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 마르코 복음서의 수난 복음에서 예수님이 마지막 말씀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이다. 마태오의 수난 복음(27,46)에서도 똑 같이 말씀하지만, 루가복음에서는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루가 23,46)이며, 요한복음에서는 ’다 이루었다’(요한 19,30)라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하셨다. 루가복음과 요한복음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신 것으로 보이지만, 마르코나 마태오 복음의 마지막 말씀은 끝까지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시면서도 아버지의 일을 이루고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빌립 2,6-8)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이 고뇌하시는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 신앙생활의 모델이다.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것은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미며 살거나, 독신을 택하여 성직자 수도자로 살아가도 마찬가지이다. 성격이나 여러 문제로 갈등을 겪으며 사는 부부들은 독신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온갖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만을 따르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 쉽다. 또 직장에서 상사와 갈등을 겪으며, 얼마 되지 않는 봉급을 받으려고 자존심까지 버리면서 살아가거나, 수익성 없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농부들도 본당신부들의 삶이 마냥 편하게 보일 수 있다. 눈 앞의 이익 때문에 불의와 타협을 하며 살아야 하는 수많은 직업인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을 실현불가능한 일로 제쳐놓고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살아가기 쉽다.
솔직히 나도 성직자가 되면 평신도로 살아가는 것보다 그래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 거룩한 인생을 펼쳐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신학교에 갔었다. 세상 속에서 보다는 덜 고민하면서 마냥 평화롭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사제생활을 하면서 잠시도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평안하게 살았던 기억이 없다. 사제서품을 받고 나면 신학생 동안 떠나지 않았던 성소에 대한 갈등이 끝나고 안정되게 살 수 있으려니 기대했다. 하지만 보좌신부라는 야릇한 직분 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심지어 함께 일하는 수녀들과 이상한 힘 겨루기를 하면서 정말 하루 하루가 지옥 같이 생각되는 때도 많았다.
드디어 본당 신부로 발령을 받아 청운의 꿈을 앉고 시골신부로 부임하게 되자 이제야 말로 더 이상 갈등과 고민 없이 소신껏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참으로 암담했다. 창고 같은 공소 건물과 뒷곁에 마련된 허름한 사제관, 더 나아가서 주일 미사에 신자 50여명이 참석하였고 봉헌금 90,000원이라는 본당의 모습은 젊은 사제를 의기소침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때부터 나는 이 본당에서 내가 해야 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 년 이상 기도하면서 드디어 성전을 새로 짓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후 성전을 짓느라고 대도시 본당으로 3년간 정신없이 구걸하러 다녔다. 이제 성전은 다 지었다. 그런데 나는 성전만 지으면 편안하게 지내다가 본당임기를 마칠 수 있으리라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시골성당은 지금 심각한 곤경에 처해있다. 젊은 사람들은 온갖 이유로 다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있는 상황이 바로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이 아름답게 지어진 성당이 이런 현실 때문에 다시 공소로 전락할 위험성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 성당과 같은 시골성당들은 이대로 가면 언젠가 문을 닫아야 할 날이 올 것이 분명하니, 침체되지 않도록 무엇인가 대안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날도 많다. 본당 임기를 채우고 떠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본당에서 내가 해야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잠시도 편안하게 살 수 없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삶은 항상 갈등과 번민의 연속인가 보다. 늘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여러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서 갈등하며 살아가야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잠시라도 머무르려고 하는 순간, 이만하면 신앙인으로 잘 살고있다는 자위, 그 누구보다도 사제로서 잘 살고 있다는 자만감은 정신에 온갖 욕망과 집착을 가져오게 만든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길도 죽음의 순간까지 갈등과 번민의 삶이었다. 그래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절규하셨던 것이다. 우리 본당의 십사처 중에 제 1처가 명작품이다. 조각가 한진섭 선생이 검은 돌에 부조로 조각을 하였는데 단순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자아나게 만드는 것이서 그 앞에 서서 묵상하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빌라도 궁전에서 십자가 형벌로 사형선고 받으시는 장면이다. 예수님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고뇌하시는 모습 속에서 나와 같은 인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제 1처 앞에 서서 게세마니 동산에서 ’내 영혼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입니다’(마르 14,34)하며 고뇌 속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시고자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하셨건만 사형선고를 쉽게 받아들이시지 못하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도대체 아무 죄도 없는 내가 왜 저런 못된 무리들에게 힘없이 당해야만 하는 것인가? 과연 이대로 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시는 인간 예수의 내면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명작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어려운 시련을 만나면 하느님의 뜻이 아닐 것이라고 반항한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어떤 어려움이라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점점 살아가면서 좀 더 확실해 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유한한 우리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의 뜻을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진리를 우리들에게 몸소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비록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십자가 형으로 죽기까지 순종하시며 예수님은 자기 포기, 자기 비움이 우리 신앙인들이 끝까지 걸어가야 할 삶의 모습인데,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 사제로서 살기로 결심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만을 따를 것이라고 했으면서도 내 뜻만을 고집하고 내 욕망을 추구하는 삶으로 서서히 변해갔던 것이다. 춥고 긴 겨울을 지나고 생명력이 약동하는 봄을 맞이하면서도 기지개를 활짝 펴지 못하고 살았던 지난 한 달 동안의 의기소침했던 마음을 떨쳐버리고 싶다.
버릴 것은 버리고 모든 것을 제 위치로 갔다 놓고 나서 보니 마음도 고요해 진다. 텅 빈 마음으로 성지가지를 준비하러 뒷산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진다. 늘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게 그리 쉽지 않은 것이 우리네 속물들의 삶인 것 같다.
☞ 제 강론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다른 강론이나 묵상 글을 보시길 원하시면 저희 성당 홈페이지 www.artchurch.or.kr을 방문해 주세요. 그리고 자유게시판에 글을 남겨주시면 많은 분들과 사랑의 나눔을 하실 수 있습니다. 성지주일에 대화에서 부시맨 신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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