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과 후회없는 삶(부활대축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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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황인찬 | 작성일2000-04-22 | 조회수2,907 | 추천수27 | 반대(0) 신고 |
부활과 후회없는 삶(부활대축일 강론)
그동안 굿뉴스 게시판 ’오늘의 묵상’을 통해서 나의 강론을 읽어주신 형제 자매님들과 부활의 기쁨을 나누고 싶은 부활절을 맞이하였다. 부족한 강론을 읽으시고 도움이 되셨다고 가끔 소식을 전해주실 때마다 더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글을 게시해야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사실 오늘의 묵상에 글을 띄우려면 수준 높은 많은 네티즌들이 접속을 하기 때문에 상당히 고심을 하면서 준비를 한다. 그럼에도 매주 이렇게 강론을 준비해서 게시하는 것은 글을 읽어주는 분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바로 내 자신이 게을러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모든 시골성당 신부님들이 비슷한 처지에서 사목을 하시겠지만, 저희 성당에는 수녀, 사무장 등 아무도 없이 나홀로 살고 있다. 성목요일, 성금요일에 성당에 가셨던 분들은 느끼셨겠지만 예수님이 직접 전례를 집전하신다고 해도 실수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성삼일 전례는 복잡하다. 게다가 성가대와 반주자도 없으니 노래로 하는 부분에서는 그야말로 음치클럽의 본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제는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하고 내가 선창하면 ’모두 와서 경배하세’하고 응답하는 십자가 예절을 하는 중에, 그 엄숙해야 할 순간에 여기 저기서 킥킥웃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계응의 음과 리듬이이 너무 안맞으니까 아무리 시골교우들이라고 하더라도 한심하게 들렸나 보다.
대부분의 젊은 이들이 머물 수 없는 시골은 이미 노령화에 접어들은 정체된 사회이다. 그러니 성당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주일 미사에 참석하는 교우수가 100여명도 채 되지 않는 날이 절반이 넘고, 그나마 60세 이상 어르신네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주일 강론을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 처음 3년간은 PC로 강론을 쓰면서 준비하다가 4년째 되면서 시골성당의 현실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말았다. 열심히 준비해 봐아 들어줄 사람도 없다고 생각되자 그때부터 대충 복음 줄거리와 신변잡기를 풀어서 강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신자들은 별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지만 내가 맥이 빠지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지난 1월에 인터넷을 시작하고, 가톨릭 굿뉴스에 가입하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오늘의 묵상에 강론을 띄우면서 이제 내 강론을 들어줄 사람이 훨씬 많아졌다는 것에 다시 강론준비가 재미있다. 그래서인지 올 봄에는 농사철이면 눈에 띄게 줄어드는 주일미사 신자수를 보면서 실의에 빠지던 예년의 봄과는 다른 봄을 맞이하고 있다.
덕분에 나는 지난 사순절을 지내면서 많은 묵상하며 지냈다. 특히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시며(빌리 2,6)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했던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삶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다’는 진리를 이번 성삼일 전례를 집전하면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오늘 성삼일을 보내고 부활절 토요일 아침을 맞이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산행을 하면서 부활절 강론을 묵상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죽음을 당당하게 맞이하실 수 있었을까? 그리고 왜 부활한 주님의 모습에 대해서는 성서(마태 28,1-8; 마르 16,1-8; 루가 24,1-12; 요한 20,1-9)는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않는가?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는 별관심이 없어서 성삼일 전례에는 잘 참석하지 않고, 관심이 많은 부활절에는 반드시 참석하려고 하는 것 같던데. 왜 성서가 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마 예수님께서 후회없는 삶을 살으셨기 때문에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신 것 같다. 그분은 게세마니 동산에서 피땀 흘리시며 "아버지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라고 기도하신 것에서 당신의 삶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신다. 아버지의 뜻을 다 아시지 못했으면서도 마지막에는 자신의 뜻 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고 고백하시며 돌아가시는 모습에서 예수님이 진정 후회없는 삶을 살아가셨음을 알 수 있다.
나자렛의 포근한 안식처를 떠나 출가한 그분은 머리 둘 곳도 없이 안정되지 않는 삶을 살으셨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느라 풍랑 속에서도 뱃고물을 베고 주무셨을 정도 피곤한 여행을 계속하셨다. 또 율법과 형식에 얽매여 가난한 백성들을 구속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과 싸움을 벌이시다가 배척도 당하신다. 좌충우돌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으시고 어둠 속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빛을 비추어주시고자 애쓰셨다. 그러면서도 당신의 사명을 이어받은 제자들을 훈련시키시는 교육에도 전념하시게 된다. 그러나 결국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형으로 사형을 받으시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시는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가장 후회없는 삶을 살으셨을 것이 틀림없다. 자신의 모든 삶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여정을 사셨기에 이유없는 고통과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당당하셨던 것이다. 이런 삶에 대한 보상으로서 아버지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부활이라는 영원한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주셨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부활은 무의미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던 결과라기 보다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려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결과라고 해야 맞을런지도 모른다. 이렇게 묵상하고 보니 예수님의 부활이 결고 그분의 이승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그냥 부활의 영광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고 했던 삶의 결과이다. 그래서 성서에서 수난과 죽음의 내용은 그토록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짧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시골신부로 살아가면서 주어진 상황이 어렵다고 속으로 불평하고 심지어 하느님을 원망한 적도 많다. 20대 청년 교우가 한 명도 없으니 주일학교도 운영하기 어렵고, 농사철에는 그나마 적게 나오는 주일미사 교우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어 미사를 성의없이 드린 적도 있었다. 부임해서 지금까지 레지오가 3팀 밖에 만들지 못했고, 어떤 평일 미사에는 내가 미사해설, 1독서, 복음을 다 해야 할 때 내가 정녕 가톨릭 교회의 신부인가 스스로 의심도 갈 때가 있었다. 특히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강론준비를 성실히 하지 않고도 강론을 했던 나의 지난 날은 정말 어두운 과거로 남아있다.
부활대축일 미사 후에 우리는 부활계란을 깨서 먹는다. 예쁘게 그려졌건 아니건 간에 부활계란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나게 한다. 껍질을 깬다는 것은 자신이 갖혀있는 세계를 벗어버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부활은 자신의 어두운 과거의 삶과 현재의 주어진 불행한 삶에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이다. 나도 어두웠던 과거의 삶을 벗어버리고 희망찬 내일을 꿈꿔본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절망과 같은 상황이 닥치더라도 포기않고 다시 일어서리라.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신 삶을 본받아서 나도 남은 내 인생을 후회없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 강론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다른 묵상글을 보시고 싶으시면 저희 성당 홈페이지(www.artchurch.or.kr)를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게시판에 좋은 고견도 남겨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부시맨 신부가 부활을 축하드리며 성토요일 아침에 드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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