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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씨 뿌리는 농부와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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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황인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0-05-02 조회수2,590 추천수13 반대(0) 신고

씨뿌리는 농부와 부활

 

성당 뒤꼍에는 제법 넓은 밭이 있다. 비가 오면 좋아하는 테니스를 치러 가지 못하는 운동을 대신하려고 이른 아침에 산보를 하곤 한다. 밭 사이에 난 길이 산책길이 때문에 들녘에서 일하는 농부들과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된다.

품앗이로 일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일손이 예사롭지 않게 빠르다. 미리 비닐로 씌어놓은 밭이랑에 두 사람이 짝을 맞추어 일하곤 하는데 서로 손발이 척척 들어맞는다. 한 사람이 고추모를 놓고 앞서 가면 다른 사람은 흙을 덮어 모를 튼튼히 고정시키며 뒤따른다. 일하는 이들은 젊은 아낙네의 모습도 간혹 보이지만 대개는 노인들이 대부분이어서 농촌현실의 현주소를 실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봄이 되면 그리 밝지 못한 농촌현실에도 불구하고 농부들은 허리를 질끈 동여매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씨를 뿌린다.

씨를 뿌리는 농부의 마음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진솔함을 본다. 나도 한 때 농부가 되고픈 시절이 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도 모른다. 어린 시절 강화도의 중농의 집안 둘째 아들로 태어난 나는 공부하라는 소리는 한 번도 듣지 못했지만 일하라는 소리는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자랐다. 농사를 짓지 않으면 굶어죽는다는 어른들의 가르침이 사실인지 알았다. 고향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지 알았던 다른 농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세상과 단절되어 자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과 밭에서 일하는 것이 힘이 들면서도 즐겁게 생각되었다. 힘들게 일하시는 조부모 님과 부모님을 조금이라도 도와드릴 수 있다는 보람이 나의 어린 마음에도 있었나 보다. 초등학생 때는 방과후에 집에 돌아오면 책보자기를 마루에 던지고 이내 소를 몰고 산으로 가서 소풀을 뜯기고 해질녘에야 집으로 돌아가거나, 들녘에 나가서 참새를 쫓는 일을 했다. 중고등학생 때는 본격적으로 봄에는 모내기를 하고 가을에는 벼 베기를 하면서 농사일을 배울 수 있었다. 여름방학 때는 뜨거운 뙤약볕 밑에서 농약을 주기도 하고, 쭈그리고 앉아서 고추밭 김매기도 했다. 아침저녁에는 할아버지가 깍아놓은 소여물을 지게로 져서 나르기도 했다.

엄하신 아버지는 공부보다는 농사일을 배워야 한다고 하시면 일을 시키셨다. 이에 비해서 집안의 장손인 형님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미 서울로 유학을 보내셨으면 서도 말이다. 덕분에 소로 쟁기질하는 것만 빼고는 온갖 농사일을 다 배우면서 자랄 수 있었다. 하지만 꾀가 낳는지 나는 고등학교를 인천으로 진학을 했다. 물론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나 혼자 결정하였다. 둘째 아들의 반항아적인 기질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나 보다. 간신히 보증금 5만원에 월세 5천원 짜리 자취방을 얻어서 밥을 해 먹어가며 학교에 다녔지만 대학이라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나는 주말이면 시골집에 내려가서 일을 해야했다. 그래야 쌀 됫박이라도 들고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이나 겨울방학 때면 여지없이 시골집에 가서 일을 하면서 방학을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다른 친구들은 과외다 학원이다 해서 열심히 공부한 모양인데 나는 그 긴 방학 동안 일만 하면서 지냈으니 얼마나 깨이지 않았는지 알 만 한 일이다. 이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3년 동안 둘째 아들이 자취하는 방에 부모님이 한 번도 오시지 않았어도 나는 아무 어려움도 느끼지 못하였다.

김치가 없으면 단무지를 사고, 내 딴에는 영양 보충을 한다고 계란을 뜨거운 밥에 넣어 마아가린과 간장으로 비벼먹으면서 자취를 했으면서도 많은 농사일 하시며 다섯 명의 동생들을 뒷바라지하시는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이렇게 지내면서도 부시맨 처럼 키 작고 못생긴 나는 순진하게 공부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대학엘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너도나도 다 가는 대학이지만 그 때만 해도 시골의 초등 학교 동창들 중에 나 하나만 대학에 들어갔다면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나는 이 다음에 농촌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대학에서도 또 자취를 하면서 도시에 대한 추억이 그리 아름답지 못해서인지 늘 고향이 그리웠다. 들판에서 땀을 흘리며 피사리를 하다가 집 앞마당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퍼서 샤워를 하고 나서 상추쌈에 보리밥을 맛있게 먹고 사랑방 툇마루에서 낮잠을 자는 맛이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대학 4년 동안도 연애 한 번 못해보고, 물론 내가 못 생겨서이지만, 늘 시골집에 가서 일하지 않으면 큰 일 나는 것으로 알았던 나는 대학 졸업 후 농사를 지면서 새마을 지도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잘 사는 농촌을 건설하는 역군이 되는 것에 대해 이상적인 환상을 품었던 나는 둘째 아들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말았다. 루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의 재산을 물려받아 도시로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장자상속권 문화인 이스라엘에서 모든 재산은 장손에게 물려준다. 따라서 둘째 아들은 집에서 뼈빠지게 일해봤자 나중에 흥부처럼 가난을 면치 못할 것을 간파한 것이다. 그러니 둘째 아들은 똑똑했고 영리한 인물이다. 만일 그가 도시에 나가서 성공했다면 왜 돌아온 탕자라는 오명이 붙었겠는가? 나는 대학을 졸업할 때쯤 이런 것에 눈을 떴다. 시골집은 형님 것이지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군 생활을 하면서 ’천국의 열쇠’를 읽다가 프란치스 치셤 신부님의 휴머니즘에 매료되어 신부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이 성소의 시작이라고 생각되지만, 내가 시골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은 이런 복잡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시골 마을에서 사목하는 신부로 살아가지만 농촌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게 생각되는가 보다.

어린 시절부터 농사일을 싫어하지 않았기에 농촌에 대한 추억이 더욱 아름답게 남아있다. 농사짓는 것이 싫어서 고향을 떠났던 것이 아니기에 성당 뒤꼍에 일하는 농부와 아낙네들의 모습이 정겹게 느껴진다.

한 때 열 네 명이라는 대식구가 오순도순 살았던 시골집, 아침저녁이면 아랫목 윗목에 상이 두 개씩이나 차려져 있고 온 식구들이 맛있는 콩밥과 누룽지를 먹었던 식사시간이 그립다. 내가 신부가 되지 않았으면 과연 지금 어릴 때부터 꿈꾸어 오던 농사꾼이 되어서 봄이 되면 씨를 뿌리고 가을에 열매를 거두는 삶을 살고 있을까?

아마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농촌의 낭만적인 모습은 경제논리에 의해서 철저히 파괴되어 있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기 때문인데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으리라. 최소한 농촌만은 우리의 영원한 따스한 고향으로 남아있어야 하는데...

오늘 저녁 미사에 할아버지 두 분과 할머니 세 분만 참석하셨다. 1독서와 화답송 알렐루야 그리고 복음까지 모두 내가 읽어야 했다. 농촌현실의 현주소이다. 농번기만 되면 그나마 적게 나오는 신자수가 절반으로 줄어든다.

부활시기를 맞이하여 참으로 기뻐해야 할 우리 신자들은 가혹한 농촌 현실에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전해야 할 지 모르겠다. 다만 내가 믿는 것은 농부들은 그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보다 부활의 신비를 몸으로 체득한 사람일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해마다 봄이 되면 죽은 것 같은 말라버린 씨앗을 뿌리는 농부는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천성적인 성품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나는 가장 잘 알 수 있으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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