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가톨릭교회 신자는...(부활 5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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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황인찬 | 작성일2000-05-20 | 조회수2,319 | 추천수10 | 반대(0) 신고 |
풍부한 유산을 간직한 교회
성당 앞마당에 포도나무 한 그루가 외로이 서 있다. 성당 새 부지를 구입할 때부터 있었던 것인데, 제대로 관리를 해 주지 않아서 그런지 열매를 맺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도 작년 여름에 여러 사람들과 따먹게 해 준 나무이다. 겨울이면 앙상한 줄기만 남아서 월동을 하다가 늦은 봄부터 잎이 나오고 있다.
포도나무는 덩굴성이므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모양을 만드는데, 그 방법에 따라 한 줄기 씩을 키우는 방법, 우산처럼 키우는 방법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평덕 위에 올려놓는 방법 등이 있다. 일년생 가지에서 포도가 열리기 때문에 가지를 잘 관리해 주는 것이 수확의 많고 적음을 결정한다. 많이만 수확하려고 가지가 나오는 대로 내버려두면 열매가 잘아서 상품성이 없고, 또 반대로 가지 한 개만 남겨두면 열매는 많지만 수확량이 적으므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새순이 나오기 전인 2월 하순에서 3월 중순 사이에 가지치기를 어떻게 해주느냐에 따라서 포도농사의 성패가 결정된다. 따라서 가지치기는 포도농사의 일년 수확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 때 잘려져 나간 가지는 열매를 맺지 못하니 태워버리게 된다. 그러나 전지 가위의 심판을 받지 않은 가지는 일년 동안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이 직접 포도농사를 지어보셨는지는 모르지만 포도나무의 일생에 대해서 잘 아시고 계셨던 것 같다. 그래서 포도농사를 비유로 해서 복음을 가르치시고 계시다. 그분은 현장의 생생한 삶을 토대로 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참된 교육자시기도 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라는 말씀에서 가지치기를 하는 주인은 하느님 아버지다. 따라서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모조리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잘 가꾸신다"는 구절에서 남겨둘 것인가 잘라버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분은 하느님 아버지라는 것이다. 포도나무에 가지로 붙어있다는 것은 축복을 받은 것이다.
요한 복음은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쓰여진 복음서이다. 기원후 95년경은 그리스도교가 이미 유아기적인 상황을 벗어나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세력으로 부상하였던 시기이다. 이에 비해서 기원후 70년경에 쓰여진 마태오 복음에서 그리스도교는 아직 소종파로서 유대교의 아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아브라함 이후부터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였음을 강조하고 있다.(마태 5,16-20) 예수는 구약의 예언을 완성한 메시아라는 신학을 주장한 마태오 복음은 그 배경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독창성이 강조하지 않는 비해서, 요한 복음은 유대인들을 적대시하면서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게 된다. 최근에 교황님이 2차 세계대전 중 그리스도교가 유대인들이 나치에 의해서 학살되는 것을 방조한 것을 고백성사한 것도 요한 복음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에 대한 가지게 된 적대감 때문이었다.
오늘 복음에서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바로 그리스도교인으로 살아가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성당 안에서 미사 드릴 때만 신앙인이 되었다가 성당 대문 밖에만 나가면 세인들과 똑같아지는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농부가 포도나무 줄기에서 모조리 쳐낼 열매맺지 못하는 가지와 같다. 그러나 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영적인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잘 가꾸어지는 가지와 같다.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적대시했던 유대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거짓 신앙인들이 아니었다. 아마도 추측 건대 그들이 살아갔던 만큼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토라를 암기하고 과월절 행사를 정성스럽게 거행하며 돼지고기 오징어 등 부정한 음식을 절대로 먹지 않으며 자녀들에게는 이런 유대교적 전통을 철저히 가르치는 신앙교육은 지금도 모범적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유대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는다. 그저 단지 구약의 예언자들이나 세례자 요한 같은 또 하나의 예언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유대교는 그리스도교가 아니다. 이에 비해서 그리스도교는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듯이 하느님의 독생성자였지만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고,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당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시는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음을 고백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이다. 이 때문에 유대교와 차별화를 강조하는 것은 초기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절실한 문제였다.
포도나무 비유는 이런 배경에서 생겨난 복음이다. 그러니까 포도나무 비유는 그리스도교가 대적하고 있는 유대교와의 치열한 싸움에서 생긴 호교론적 가르침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 나라의 상황은 다원성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황을 맞이하여 어떻게 하면 잘려나간 가지가 아니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축복된 가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먼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불러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또 그 중에서도 거룩하고 공번되며 하나이고 사도로부터 이어온 가톨릭 교회의 신자로 불림 받았다. 우리 교회는 이천 년 동안 쌓아온 풍부한 영적 유산을 간직하고 있으며 누구든지 이 유산을 이어받을 수 있는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으로 부터 이어져왔다.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행하려는 참된 믿음을 간직한 가톨릭 교회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지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세세대대로 하느님 아버지가 잘 돌보아 주시는 가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종교 안에는 구원이 없다거나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속해 있는 교회가 참된 종교라는 사실을 더욱 확고히 해야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정체성을 이어갈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림을 받았으니 요한 1서의 말씀대로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이며, 이런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 신앙인들은 사랑의 계명보다는 교리중심, 율법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교리와 율법 중심적인 생활을 가장 잘 했던 사람들이 바로 유대교이다. 현재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유대교의 이런 오류를 답습하려는 어리석음에 빠져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유대교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랑의 계명보다는 율법 중심적인 삶의 결과였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잘려진 가지로 불에 태워지는 심판을 받는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이 가장 싫어했던 형식적인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나 않은지 자신을 늘 성찰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톨릭 교회와 그 구성원들인 우리들도 언젠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로 모조리 잘려질 운명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년 봄 성당 앞에 있는 포도나무의 가지치기를 할 때 신중히 해야 할 것 같다. 잘 못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가지를 잘라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이제까지 그다지 많은 열매를 맺지 못했는데도 아직 포도나무 줄기에 붙어 있는 가지로 남아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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