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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꽃다운 수녀님들과 미사를 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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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황인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0-05-28 조회수2,394 추천수18 반대(0) 신고

부활 6주일 강론

 

꽃다운 수녀님들과 미사를 드리며

 

지난 월요일(5월 22일)부터 토요일(5월 27일)까지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녀회 소속 16명의 수녀님들이 본당에서 피정을 했다. 수련기에 있는 수녀님들인데 수련장 수녀님의 인도로 잠시 수녀원의 수련소를 떠나서 시골 성당에서 새로운 분위기를 모색하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자유로움을 추종하는 수도회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16명의 수녀님들이 이런 시골본당을 찾아준 것이 고마워서 잘 해 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사제연수회 때문에 미사도 함께 드리지 못했다. 연수회에서 돌아와서 미사를 함께 드리고 오후에는 뒷산으로 산책도 가면서 강원도 산천(山川)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었으면 했다. 꽉 짜여진 수련기 속에서 잠시라도 숨통을 트이도록 도와주자는 내 생각 때문에 수련장 수녀님이 곤란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신학교에서 반복되는 생활에 지겨움을 느꼈던 생각을 하면서 수도생활의 입문기에 들어서 수녀님들에게 무엇인가 신선함을 선사해 주고 싶음 순수한 마음이었으니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지난 토요일 오전에 수녀님들과 고별미사를 하게 되었다. 다섯째 여동생과 같은 나이의 수녀님들이 험난한 수도생활을 일생동안 해나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결혼을 포기하고 젊음을 다 바쳐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삶을 살겠다고 시작한 수도성소의 길이다. 그러니 가장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수녀님들들이 올바른 수도성소의 길을 찾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은 것 같아서 안타깝다. 그 이유는 각 수도회 나름대로의 전통과 규율이 있는데, 그 대부분이 예수님이 가르치려고 했던 복음 내용과 어긋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수도생활을 통해서 무엇인가 거룩한 삶을 추구하고자 했던 많은 수도자들이 내적인 기쁨과 평화 없이 억지로 살아갈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나는 수련 수녀님들에게 다음과 같은 강론을 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최초의 수도자는 사막의 교부 안토니오 성인이다. 성인은 ’부자 청년의 이야기’(마태 19,16-22; 마르 10,17-22; 루가 18,18-23)를 읽게 되었다. 부자청년은 예수님을 찾아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지 여쭈었다. 그 청년은 유대교에서 가르치는 계명을 이미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내심 자신만만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명만 지키는 것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으니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가르침을 내리신다.

 

부자청년은 이 말씀을 듣고 슬픈 마음이 들었다. 결국 성서는 그가 재산을 나누어 주지 못하고 계속해서 부자로 남아 있으므로 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읽은 안토니오는 아버지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은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막으로 들어가 수도자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러니까 수도자는 "하느님이 완전하신 분이니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는 말씀을 따라 살려고 출가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런 본질은 간 데 없고 각 수도회마다 온갖 전통과 규칙을 예수님의 복음 보다 다 중요하게 생각해서인지 수도생활이 기쁨과 활력을 잃어버리고 있다. 물론 이런 문제는 수도자들 뿐 아니라 성직자들에게 더 심각한 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서 복음을 따라 살겠다고 세례성사를 받아 하느님의 백성이 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끊임없는 하나의 과제이다. 이렇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으시면서까지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구원과 해방의 복음은 간 데 없이 교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중에 가장 잘못된 교리 중에 하나가 세상과 교회 그리고 육체와 영혼이 서로 적대적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성서를 잘 못 해석함으로서 나타나는 오류이다. 특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도 나를 먼저 미워했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요한 5,18)는 내용은 신자와 믿지 않는 자들을 대립시키는 관계를 조장하고 있다.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는 특히 세상과 교회가 서로 화해할 수 없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즉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대립되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이런 내용은 2천년 교회사에는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금도 많은 신앙인들이 육체는 썩어 없어질 것이니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수도자들은 이런 생각이 교회의 가르침인 양 당연하게 받아들여 심각한 질병으로 진전되고 나서 후회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영혼만이 선한 것이고 육체나 정신은 악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이미 잘못된 생각이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영혼이 깃든다’(asics, anima sana in corpore sano)는 라틴어 격언이 있다. 나는 일 년에 한 번씩 심한 몸살을 앓는다. 그 때마다 이렇게 앓다가 못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약한 마음이 들곤 한다. 그래서 육체를 잘 다스리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지 거듭 느끼고 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술 담배에 대해서 금하지 않는다고 해서 신자들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거나 담배를 피워서 몸에 병들게 하는 것을 많이 본다. 이런 사람은 교회를 위해서 많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도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수도생활을 시작하면서 육신을 잘 다스리는 훈련을 병행해야 올바른 영성생활을 해갈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수녀님들이 과중한 업무 때문인지 운동부족과 균형잡히 않은 식생활로 자신의 몸을 학대하고 있다. 피정 중에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는데 순 하얀 쌀밥만 먹는 것을 보고 잡곡을 섞어 먹으라고 잔소리를 했고, 산책을 함께 하면서 걷는 운동의 소중함을 느꼈으면 했다.

 

이런 말을 한 것은 세상과 교회, 육신과 영혼을 대립시키는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은 올바른 그리스도교의 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이 쓰여질 당시(기원후 95년경)에 유행하던 영지주의는 이원론의 대표적인 사상이었다. 복음사가 요한은 이런 사상을 받아들여 요즘 우리가 읽고 있는 요한 복음을 기록했다. 그래서 요한 복음은 육적인 것은 나쁜 것이고, 영적인 것은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며 세상은 악한 것이고 교회는 선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내용을 쓰게 된 이유는 요한 복음이 쓰여질 당시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완전히 결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의 적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다(요한 5,59; 9,18 등). 이런 내용은 요한 복음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진리와 거짓,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믿음과 불신, 세상과 제자,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 등이다. 여기서 ’어둠, 죽음, 불신, 세상, 육적인 것’음 모두 유대인들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요한 복음은 이런 대비를 통해서 유대교에 대항해서 그리스도교의 결속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당시에 소종파에 불과했던 그리스도교가 강한 유대감으로 하나의 교회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영지주의의 이원론을 받아들여 유대인들을 육적인 무리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강하게 몰아부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이런 역사적인 배경은 무시한 채 요한 복음의 이원론을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로 믿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특히 한국교회는 이런 잘못된 역사의 큰 희생양이었다. 그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우리 나라에 전교를 했던 프랑스 외방전교회의 영향 때문이었다. 외방전교회는 17세기 벨기에 루뱅대학에서 비롯된 얀세니즘 이단 사상을 한국인들에게 전해주었다.

 

얀세니즘은 인간의 의지(펠라지아니즘)냐 혹은 하느님의 섭리(정적주의)냐 하는 영성사(靈性史)의 이단적인 흐름들 속에서 펠라지아니즘 경향을 띠게 된다. 이 사상은 당시 교회가 윤리 의식이 너무 이완되어 있어 잘못된 문제들을 그냥 묵인하고 있다고 보고 심판하시는 하느님을 강조한다. 또 잘못한 사람들은 용서받지 못한다는 가르침을 설파하게 되어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보다는 두려움, 경외심을 갖는 종교적 심성이 갖게 하였다. 특히 얀세니즘은 극단적인 금욕행위들(극기, 고행, 자기부정 등)을 자신의 인간성과 이웃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행하도록 강요하였다.

 

이 사상을 알게 모르게 받아들인 프랑스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에게 왜곡된 그리스도교 교리를 가르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한국 천주교회는 그리스도교를 기쁜 소식 으로 생각하기 보다 금욕주의 같은 무거운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속, 육신, 마귀를 삼구(三仇)라 하면서 육적인 것은 악한 것이며 영적인 것만이 선하다는 이원론이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모든 신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특히 수도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신자들의 무의식 속에 무슨 훌류한 유산처럼 남아있을 뿐 아니라 수도자들의 생활에서 더 심한 것 같다. 성직자들도 수단을 입으면서 세상에 대해서 즉 육신에 대해서 죽기로 결심하지만 교구 사제로 세상 속에서 더불어 살다 보니 이원론은 더 이상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수도원은 세상과 격리된 일정한 장소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과 교회를 분리하는 이원론에 쉽게 빠질 수 가능성이 있다. 또 수도복을 입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양식을 고수하는 것도 자칫하면 세상을 적대시하는 그릇된 영성을 고착시킬 수 있다.

 

이같은 문제는 수도자들 뿐 아니라 사제들과 모든 신자들도 깨어있지 않으면 누구나 이런 오류에 빠질 수 있는 것 같다. 지금 우리들이 갖고 있는 신앙이 자신과 가족 혹은 교회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해서 열려있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요’라는 파견은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내용이다.

 

예전에 사용했던 교리문답집의 첫째 문항이 "사람이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느뇨?"라는 질문에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내용이다. 그리스도교의 근본 가르침은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자기 영혼 구원을 이루는 것을 뛰어넘어 온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목표 ’위로는 깨달음을 얻고 밑으로는 중생을 구원하라’는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나는 수련 수녀님들에게 계속해서 이렇게 권고했다. 수녀님들이 출가해서 수도생활을 하는 궁극적 목적은 세상의 복음화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15,18-19)라는 말씀을 글자 그대로 알아듣고 이원론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올바른 가르침이 아니다. 매일 반복되는 기도생활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 보다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 순간마다 온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신원 의식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는 신앙인들이 자기 영혼 구원만을 위하지 않고 온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명령을 받았다. 더 나가서 새 천년을 맞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더 큰 사명을 부여받았음을 명심해야 하리라.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창조질서의 보존이다. 인간 중심적인 구원 개념에서 벗어나 온 우주의 구원을 위한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첫째 과제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의식 안에서 우리의 각자의 구원도 이루어져야 하고 사회정의와 평화가 정착되야 한다. 대자연의 질서를 파괴시켜 버리고 인간만의 구원과 평화는 없다.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 다시 수련원으로 돌아가는 수녀님들의 영육간의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행복과 기쁨 속에서 수도생활을 잘 하기를 미사 중에 자주 기도하련다. 5박 6일의 피정을 마치고 수련원으로 돌아가는 열여서 분의 수련 수녀님들! 젊음을 바쳐 투신한  삶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를 기원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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