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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모세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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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순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0-06-08 조회수2,426 추천수7 반대(0) 신고

                                             대구 평화 방송 99, 11, 3  화

       

     마태오 23, 1-12: 모세의 자리(본인이 붙인 제목)

 

     23, 1그 때에 예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어 2이르셨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좌석에 앉아 있습니다.

 

   3그들이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은 다 행하고 지키시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을 따라 행하지는 마시오. 사실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는 않습니다.

 

   4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들을 꾸려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고 자기들은 그것을 저희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5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모든 일을 합니다. 사실 성구갑을 넓적하게 하고 옷단에 달린 술을 크게 합니다. 6그들은 잔치에서도 높은 자리, 회당에서도 높은 좌석을 차지하는 것, 7장터에서는 인사받는 것과 사람들로부터 랍비라고 불리는 것을 즐깁니다.

 

   8그러나 여러분은 랍비라고 불려서는 안됩니다, 사실 여러분의 선생은 한 분이요 여러분은 모두 형제들입니다.  9또한 여러분은 땅에서 (누구를) 여러분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시오. 사실 여러분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10여러분은 사부라고 불려서도 안됩니다. 여러분의 사부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11여러분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낮추어지고 12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여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게될 마태 23,1-12의 이야기 앞에서는 다윗의 아들로서가 아닌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우리 이야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정체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얘기되고 있는지요? 기록된 말씀을 잘 읽어보실까요?

 이 말씀 안에는 자리와 관계되는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모세의 좌석", "높은 자리", "높은 좌석", "가장 큰 사람", "높이는, 낮추어지고, 낮추는, 높아지는"...  말하자면 이 말씀 안에는 그리스도의 제자와 자리에 관한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 자리와 관련된 말씀에 귀 기울여 볼까 합니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좌석에 앉아 있습니다"

    모세의 자리와 모세는 다르지요?  모세의 자리는 모세가 아닙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자기가 모세가 아니라 모세의 일을 대신 수행해야하는 임무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즉 자리의 본 임자와 자신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신은 자리의 본 임자를 위한 봉사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 역시 하느님의 파견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위해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를 오간 위탁된 심부름꾼 아닙니까?  모세의 자리란 바로 이 역할을 말하는 것이며, 또 모세의 자리에 현재 앉아 있는 율사들과 바리사이인들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곧 모세를 이어 자신들을 통해 가르침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보여주어야 하는 역할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유일하게 관심을 갖고 행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지요?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더 잘 가까이서 살펴보십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모든 일을 합니다. 그들은 잔치에서도 높은 자리, 회당에서도 높은 좌석을 차지하는 것,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과 사람들로부터 랍비라고 불리는 것을 즐깁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결국 자기 이미지 만들기와 관계되는 것들입니다. 소위 유행어로 자기 이미지 관리에만 신경을 쓴다는 얘기지요. 어떻게 하면 자신들을 통해 하느님을 잘 보여줄 수 있을 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할까에만 신경 쓰고 행동합니다.  모세와 하느님이 그들 뒤로 감추어집니다.  모세도 하느님도 자신들의 이미지 관리,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 이용될 뿐입니다.  자신들이 어떤 이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을 망각하고서 즉 자리와 자신을 착각하고, 혹은 고의로 그 자리를 자신의 고유한 자리로 착복 횡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로서는 백성들에게 실행하기 어려운 법칙들을 가중시킵니다.  그들은 말로써 폭력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명령하는 자와 명령받는 자간의 상하관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제자들이 서로간에 이루어야하는 다른 관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상하관계와는 다른 관계 즉 형제의 관계에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평등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랍비라고 불려서는 안됩니다. 사실 여러분의 선생은 한 분이요 여러분은 모두 형제들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땅에서 (누구를) 여러분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시오. 사실 여러분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여러분의 사부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랍비라고 불려서는 안 되는 이유, 그것은 그들의 관계가 하늘에 계신 한 아버지를 갖는 형제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스도라고 하는 한 스승만을 모시는 제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 곧 그리스도인이란, 하늘에 계신 한 분 아버지를 모시는 형제여야 한다는, 그리스도 제자로서의 원칙적인 정체성에 대한 말씀이지요.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하여 하느님의 대를 있는 사람들.

 

  "여러분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가장 큰사람이란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다는 것은 다스리는 자와도 통하는데, 그런데 반대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가장 높은 자리에서 다스린다는 것의 참된 의미는 봉사한다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원칙은 이미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 모든 창조물들을 인간에게 위탁하시면서 이미 세우신 원칙이지요.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느님께서 만물을 차례로 만드신 후 창조물들의 자리와 역할을 정해주십니다.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땅의 역할), "하늘의 궁창에 빛 물체들이 생겨 낯과 밤을 가르고 징표와 절기 날과 해를 나타내도록 하여라"(천체들의 역할) , "큰 빛 물체 두 개를 만드시어...큰 빛물체는 낮을 다스리고 작은 빛 물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해와 달 별들의 역할).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 궁창에 두시어 땅을 비추게 하시고, 낮과 밤을 다스리며 빛과 어둠을 가르게 하셨다", "물에는 생물이 우굴거리고(물의 역할), 새들은 땅 위 하늘 궁창 아래를 날아다녀라"(새들의 역할), "온갖 생물들을 제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이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번식하고 번성하여 바닷물을 가득 채워라"(바다와 바다 생물들의 역할).

 

   이렇게 피조물에게 각각의 자리와 역할의 분담을 하시면서 우주의 질서를 잡아주신 후, 이제 그것들을 인간에게 위탁하시면서, "...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지배와 다스림의 참 뜻을 우리는 이 창세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곧 이 지배와 다스림은 자신들을 위해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하거나 폭력을 쓰라는 얘기가 아니고, 하느님이 창조하신 대로의 만물의 질서, 그 자리와 그 기능들이 잘 유지되도록 관리하고 봉사하라는 얘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스리는 자리, 지배하는 자리, 즉 높은 자리에 앉는다는 참 뜻을 우리가 새겨야 할 것입니다.  책임자의 자리, 직장에서의 책임, 가정에서의 책임, 부모의 책임, 모든 책임의 자리는 근원적인 한 분 하느님에게서 위탁 받은 자리라는 것을 항상 잊지말아야 할 것입니다.  율사나 바리사이인들처럼 그 분의 자리와 나 자신를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제자가 갖는 원칙적인 관계임을 오늘 이 독서를 통해 현재 우리는 알아듣고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시가 있는 풍경: 이지희 (헬레나)

 

     말이 행실을 앞서야 늘 후련했습니다

     좀 더 그럴 듯하게 보여지는 모습이어야

     만족을 느꼈습니다

 

     높고 낮음이란

     내 어설픈 판단으로

     하찮은 콧대만 스스로 높였습니다    

 

     어느 자리에 내가 앉아 있든

     오로지 하나이신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을

 

     높고 낮음이란

     겸손이라 일러주는 그 분의 잣대인 것을

 

     당신이시여, 실로

     내가 지금 앉아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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