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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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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순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0-06-17 조회수2,498 추천수3 반대(0) 신고

                                                 대구 평화 방송, 1999, 11, 9, 화

 

성서독서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감히 바라며 이 글을 띄웁니다.

 

 

 마태 25, 1 -13 신랑을 기다리는 열처녀

 25, 1"그 때에 하늘 나라는 저희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마중나간 열 처녀와 같을 것입니다. 2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습니다.

 

3어리석은 처녀들은 등불을 갖고 있었으나 기름은 함께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4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저희 등불과 함께 그릇에 기름도 갖고 있었습니다.

5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6그런데 한밤중에 "보라, 신랑이다. 마중나가라"하는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 7그 때에 그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희 등불을 챙기었습니다.

 

8어리석은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너희 기름을 우리에게 나누어다오. 우리 등불이 꺼져간다"했습니다. 9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대답하여 "안된다. 우리에에게도 너희에게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너희 것을 사라" 했습니다.

 

10그들이 사러 나간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습니다. 11나중에 다른 처녀들이 와서는 "주님, 주님, 우리에게 열어주십시오" 했습니다. 그러나 신랑은 대답하여 "진실히 그대들에게 말하거니와, 나는 그대들을 모른다" 했습니다.

 

 13그러니 여러분은 깨어 있으시오. 여러분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 *** ***         

 이야기의 방향

 이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 왕국"에 들어가는가 하는 이야기로만 읽혀지기를 거부합니다. 이야기 속의 상황들을 잘 관찰해 보세요.  1절에서 함께 얘기되던 열 처녀가 2절부터는 나뉘어져서 얘기되고 있습니다. 열 처녀가 처음 어떻게 설명되며 또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어떻게 달라지는지요?

 

 일치 (결속적인 열 처녀) --> 분열 (다섯 다섯)

 이야기는 열 명의 처녀들이 결속되어 있는 연대적인 한 그룹이었다가 반 반으로 분리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처음에 열 처녀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녀들은 똑 같이 등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고 졸다가 잠이 듭니다.

 그러나 끝에 가서 처녀들은 역전될 수 없는 방법으로 다섯 다섯 곧 반 반으로 분열됩니다. 왜 하필이면 반 반일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3대 7일 수도 있고 1대 9로 나눌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의문을 가져보는 것은 좋은 독서 법입니다. 공연히 반 반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 이야기의 함정이 있습니다.

 

  반은 신랑과 만나 혼인 잔치 연회장으로 들어가고 반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분열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요?  그것은 늦게 올 수도 있을 신랑을 기다리기 위해 등불을 밝힐 기름을 준비하고 안하고에 달렸던 것입니다. 곧 이것은 늦게 올 수도 있을 신랑을 위한 기다림의 시간을 살아가는 그녀들의 삶의 태도에 달렸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분리는 착한 처녀와 나쁜 처녀의 분리도 아니며, 신랑은 그것을 위한 심판자가 아닙니다.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 사이의 반목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마치 슬기로운 처녀들이 어리석은 처녀들을 따돌리고 혼인 잔치 연회장에 들어가기라도 한 것 같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반목의 태도도 그녀들에게서 볼 수 없습니다. 그녀들은 조언을 하고 또 충고를 듣습니다. 다만 처녀들은 신랑을 만나 혼인잔치의 연회장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순간에 있어야만 할 곳에 있거나 있지 못하거나 한데, 그것은 다섯 처녀가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 기름을 사러 갔다 온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이 이야기를 통해 "하늘 왕국"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이 이야기를 미리 도덕적 반성으로 유도하거나 어떤 심판에 대한 설명으로 바꾸지 말고, 있는 그대로 전체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처녀들은 똑 같이 만남에로 불려졌고 이 만남을 갈망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갈망은 처녀들 편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랑 편에서도 역시 그녀들을 만나러 옵니다. 그러므로 상호적인 갈망입니다. 그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이 신랑의 갈망에 응하는 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시간 안에서 이 부르심과 갈망에 응하는 태도에 따라 열 처녀들은 반 반으로 분리되었습니다.

 

 "하느님 왕국"에 대한 묵상

 "그 때에 하늘나라는 저희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마중 나간 열 처녀와 같을 것입니다..."

         

 왕국이 아직은 상상할 수 없는 미래의 것, 갈망과 기다림의 대상으로 고려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얘기되는 신랑과의 만남에 대한 기다림은 24장에서 얘기된 "인자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과 갈망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이 비유는 이 미래와 관련해서 부름을 받고 갈망하는 사람을 위한 얘기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13절의 "그러니 여러분은 깨어 있으시오. 여러분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로 끝이납니다. 그러니 결국 이 13절의 말씀을 청중들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드신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를 향해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 시간"은 너희에게 속하지도 않으며 너희가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시간,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는그러한 시간입니다.  ’오시는 분과의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시간 안에서의 만남이 너희의 갈망을 시험해서 진정한 것이 되게하는 그 시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는 너희에게 달렸다는 메시지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관찰을 계속해 볼까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고 빌릴 수도 없었던 다섯 처녀는 어떻게했나요? 우리는 그 행위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다섯 처녀가 기름을 사러간 행위는 상업적인 교환 즉 경제와 관련되는 활동입니다.  기다림의 시간과 이 경제적 활동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이 비유의 이야기는 열 명의 처녀가 이루는 한 그룹을 등장시켰지만, 이것을 욕망과 관련되는 우리 개인적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요?  말하자면 나의 기다림 안에는 이러한 분열이 없는지? 그 분과의 만남에 일치되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 사이의 분열.  오시는 그 분에 대한 진짜 갈망의 부분과 상상적인 가짜 갈망의 부분 사이의 분열.  이들 둘 중에 그 어느 것이 나의 갈망의 진정한 모습인가? 이 둘 사이의 분열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닐까요?  구체적인 한 예로서, 신랑을 맞을 준비를 중심으로 해서 살고자 하는 욕망과 경제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살고 난 후에 신랑을 맞으러 가도 되겠거니 하고 살고 싶은 욕망 사이의 분열은 우리 안에 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르기: "안된다.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너희 것을 사라"

 개인 안에 일어나는 이러한 분열에 대해 묵상 안에서, 슬기로운 처녀가 어리석은 처녀에게 기름을 나누어주지 않은 사실은, 각자 내부에서 일어나는 분열에서 진정한 갈망이 아닌 부분을 잘라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당신 손이... 당신 발이... 당신 눈이 당신을 넘어지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버리시오"라는 성서 말씀(마르 9, 42-48)의 또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내 안에서 부단 없이 일어나는 욕망의 분열에서 기다림에 대한 진짜 갈망을 방해하는 욕망들을 끊임없이 잘라내야 하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할 때 비단 마지막 날에 오시게 될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멀리 가지 않더라도, 현세 안에서 살아가는 내 자신의 내부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 내가 그 분을 알고 그 분이 나를 아는 그런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하느님의 왕국을 앞당겨 누리는  것이 아닐까요?  

 

 

상호적 만남의 실패:

        "진실히 그대들에게 말하거니와, 나는 그대들을 모른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를 신랑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이 것은 성서 말씀의 "너희가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너희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여분의 기름을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봐서, 그녀들은 신랑이 언제 오실지 정확하게는 모를지라도, 적어도 신랑이 늦게 오실 수도 있으며, 그러나 그녀들이 갖고 있는 기름이 떨어지기 전에 오실 분이라는 정도로는 신랑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랑을 자기가 상상하여 자신의 생각에 맞춘 이미지의 신랑이 아니라(자신이 준비한 기름이 떨어지기 와야하는 신랑), 진짜 모습 그대로의 신랑으로서 인정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녀들이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게 한 것은 신랑을 기다리는 그녀들의 진정한 갈망의 증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을 그 신랑의 진짜 모습으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신랑이 그 신랑의 모습대로 인정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들이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음은 신랑을 기다리는 그녀들의 갈망에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요?  신랑에 대해 제대로 모르니 신랑을 만나고자하는 그 갈망인들 진정으로 그리 간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들의 태도는 신랑을 맞으러 나오긴 했으나 그녀들이 행위로 보아 신랑을 모른다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신랑을 모르는 처녀들을 어떻게 자기를 맞으러 나온 처녀들이라고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상호적인 인정의 문제, 다시 말하자면 상대의 모습을 자신의 생각과 판단 속에 고정시켜 두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를 그 모습대로 인정하는 문제, 곧 참 만남의 문제일 것입니다.  하느님 왕국은 이러한 참 만남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한정된 여분의 기름: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모자랄 터이니":  

 그리고 슬기로운 처녀가 여분으로 준비한 기름은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나누어주고도 충분할 만큼 넘치거나 무한정의 것이 아닙니다. 준비한 기름도 언젠가는 고갈되는 한정된 량의 기름입니다. 이것에서 우리는 무엇을 묵상할 수 있을까요?  신랑이 늦어지는 시간이 처녀들의 기다림과 갈망의 한계를 고갈시킬 만큼 무한정 길지는 않다는 얘기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요? 신랑은 좀 지체할 뿐 반드시 오시며, 기다림과 그분을 만나고 싶어하는 갈망이 바닥나기 전에 오십니다.  이 사실을 우리의 기도 생활에 적용한다면, 그 분을 만나고 느끼고 싶어서 기도 안에 잠겨 있을 때, 또는 생활 속에서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조바심을 덜 칠 수 있을 것입니다.

 

 *묵상의 또 다른 길: 기름을 은총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의 기름과 사온 기름; 이야기 속에서 보면, 기름의 역할이 주위를 비추는 것에 그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기름에 불이 켜져있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길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면 다섯 처녀의 등불이 없다해도 다른 다섯 처녀의 등불로 길을 밝히고 신랑에게로 가는데에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깨어있으라"와 관련하여 볼 때, 등불의 불은 신랑이 오실 때까지 항상 켜있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불이 켜있도록 유지시켜 주는 기름에 해당하는 어떤 것은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이되,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닌 어떤 것입니다. 받은 은총과 그 은총을 유지시키는 어떤 것과의 관계 안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은총을 유지시키는 어떤 것, 그러나 돈으로 사고 파는 것이 아닌 어떤 것, 곧 돈으로 살 수 없는 어떤 것, 그러나 우리 자신이 준비해야 하는 어떤 것.            

      그리고 등불은 또 신랑이신 예수님을 향한,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그 분을 바로 알고자 하는  지속적이고도 진실된 갈망의 등불로서 묵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가 있는 풍경: 이지희 (헬레나)

 

  봄인가 하면 어느 새 겨울

     소리없이 사계절이 오듯,

     

     분명 언젠가 오실텐데

     이미 내 안에 오셨을텐데

 

     꽃이 필 때가 언제인지

     눈이 내릴 땐 언제인지

     차마 기약할 수 없는 순간 순간마다

 

     창문을 열어 나는 깨어있습니다

     

     오직 내 기다림의 자세가

     당신을 맞을 준비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꼼꼼히 읽어보셨습니까?  독자에게 영적 속삭임이 있었기를 감히 희망하면서 끝까지 읽어주신데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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