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도전과 응전의 신앙을 기리며(김대건 신부 대축일 강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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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황인찬 | 작성일2000-07-08 | 조회수2,497 | 추천수16 | 반대(0) 신고 |
도전과 응천의 신앙을 배우자
금세기 최고의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 박사는 그의 걸작 『역사의 연구』에서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법칙’으로 설명하고 있다. 인류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문명이 등장했었다. 그런데 잉카문명, 마야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등은 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반면, 중국을 중심으로 한 극동문명, 인도문명, 에집트 문명 등은 지금도 건재하다는 것을 연구한 결과 그는 자연재해나 외세의 침략 같은 도전을 받지 않은 문명은 스스로 멸망해 버렸지만, 오히려 심각할 정도로 도전을 받았던 문명 등은 지금까지 찬란하게 발전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 나라와 이스라엘일 것이다. 두 국가는 공통적으로 대륙의 교두보, 즉 침략의 건널목 역할을 하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작은 나라이다. 주위의 강대국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영토와 민족이지만 세계적으로 드문 단일 민족을 자랑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남북으로 분단되어 민족적 시련을 혹독하게 치르고 있지만 이것이 오히려 더 위대한 민족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도 솔로몬의 통치 이후 약 350년간(BC 932-586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으로 분열된 시기가 있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우리민족의 분단현실(55년) 보다 다섯 배 이상 민족적 시련을 겪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제국의 등장으로 역사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줄 알았는데 2,000년이 지난 다음 다시 지금의 이스라엘 국가를 재건하는 저력을 발휘하였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강한 민족이 된 것은 그들이 겪었던 고난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나는 토인비 박사의 이론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믿는다. 언젠가 샘터라는 잡지에서 읽은 글이 생각난다. 젊었을 때 직장생활을 시작한 사람과, 자기의 사업을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흔히 안정된 직장을 갖는 것은 젊었을 때 성공의 기준이다. 그래서 예쁜 색시도 쉽게 얻을 수 있고 일상생활을 안정 속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중년이 넘어서도 직장생활은 여전히 계속된다. 여유없는 생활은 젊었을 때나 나이가 들었을 때나 항상 그 타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 밤잠을 못 자면서 노심초사 고생하는 사람들은 중년이 지나서는 직장생활한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이 안정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린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한국인 최초의 신부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이다. 신부님은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군문효수의 형벌로 순교를 당한 분이다. 어린나이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죽을 고비를 무릅쓰고 여행을 해서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하였다. 조선인으로 최초로 성직자가 되는 것은 큰 영예를 얻는 것이다. 외국에서 공부를 하였으니 마땅히 금의환향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추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천주교를 사교(邪敎, 못된 종교)라 하여 박해의 시대였다. 조국에서 마음껏 사목 생활을 했어야 하는 신부님은 복음을 전하기도 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렸다. 그분은 25세 밖에 살지 않았고 서품받고 일년도 안되어서 죽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사람들은 신부님의 신앙과 행적을 그토록 높이 우러러보는 것일까? 가장 주된 이유는 그분이 단지 성직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신부님의 짧은 생애가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의 인생은 잠시도 편안할 겨를이 없었다. 마치 예수님 처럼 ’인자는 머리 누일 곳도 없다’는 말씀을 몸으로 살아가신 분이다. 죽음을 넘나드는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었지만 그분은 이에 굴하지 않고 용감히 응전을 하였다. 그분이 당시 조선 교우들에게 남겨준 편지를 읽어보면 그분의 용감한 신앙을 엿볼 수 있다. 나는 그분이 성직자였기 때문에 그런 위대한 신앙을 갖게 된 것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신부님의 편지가 25세 밖에 안된 젊은이가 쓴 글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놀랍다. 그것은 어떤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굽힐 줄 모르는 신앙을 갖게 된 것은 닥쳐오는 도전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응전을 하는 신부님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왔다고 생각된다. 요새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힘든 일을 시키지 않는다. 이곳 농촌에서도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는 부모가 거의 없다. ’우리 부모는 고생해도 너희들만은 편하게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자식들을 차로 등교시켜주는 광경은 흔한 일이 되었고, 무엇이든지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준다. 빚을 내어서라도 컴퓨터, 핸드폰을 사주고, 몸을 팔아서라도 과외공부를 시킨다. 집에 들어오면 자기방 걸레질 한 번 시키지 않고, 냉수 한 그릇까지 떠다 바친다. 그리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는 주문을 한다. 이것은 미친 짓이다. 자식들을 망치는 것이다. 온상 속에서 키운 작물들은 조금만 비바람이 불면 금방 몸살 앓다가 죽어버린다. 우리 자녀들도 이렇게 키우니 조금만 어려운 시련이 닥치면 금방 가출을 하거나 자살을 택하는 것이다. 모두가 부모 탓이다. 그렇게 키운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서 인성교육을 시켜달라고 하니 될 말인가? 엇그제 부산에서 학부모가 초등학교 여교사를 폭행한 사건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그런 부모에게서 자란 자식이 잘될 일이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신앙생활을 뒤돌아 보자. 요새 여름이 좀 덥다고 성당에 에어콘을 켜지 않으면미사참례자가 줄어든다고 한다. 도시에서는 옆 본당에서 에어콘을 시원하게 틀어주면 그리로 몰리는 일도 있단다. 겨울이면 성당에 온풍기를 켜놓지 않으면 춥다고 불평이다. 성당 건물도 잘 지어지고, 신부들이 많아지니 편리한 시간에 언제든지 미사참여할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 있다. 외적인 생활이 편하면 편해질수록 내적인 힘이 약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하면서 편한 것만 추구하면 김신부님 같은 위대한 신앙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신부님의 신앙과 삶을 묵상하면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가슴에 담아두자.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고통은 이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끈기는 희망을 낳기 때문이다"(로마 5,3-4). 이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신앙인들만이 마침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받는 은총을 누릴 수 있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기다릴 수 있다는 바오로 사도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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