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길과 소경 그리고 '예리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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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순자 | 작성일2000-08-09 | 조회수2,301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대구 평화방송 1999, 12, 14, 화 + 찬미 예수님 말씀과의 새로운 만남을 원하시는 분께 작은 도움이 되기를 감히 바라며 이 글을 띄웁니다.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성서 텍스트를 외우실 정도로 꼼꼼하게 읽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서독서는 Jean DELORME 신부님의 강의를 참조 하였음을 밝힙니다.
마르꼬 10, 46-52: 예리고의 소경
▷▶번역본 200주년 신약성서, 개정보급판, 1998
10, 46 일행은 예리고로 갔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함께 예리고에서 다시 떠날 때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걸인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말을 듣고 외치기 시작했다: "다윗의 아들 예수님, 불쌍히 여기소서.!" 48 많은 사람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 크게 외쳤다: "다윗의 아드님, 불쌍히 여기소서!" 49 예수께서 멈추어 서서 "그를 부르시오" 하셨다. 사람들이 맹인을 부르며 "힘내시오. 일어나시오. 그 분이 부르십니다" 하자 50 맹인이 겉옷을 내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로 왔다. 51 예수께서 맞으며 "무엇을 바랍니까?" 하시니 맹인이 "랍부니, 다시볼 수 있게 해 주소서" 하였다. 52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시오 그대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습니다." 그러자 곧 그는 다시 보게 되었고, 예수를 따라 길을 나섰다. ****** 길 위에서 한 소경 걸인이 예수님에 의해 눈을 뜨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 나서는 것이 이 이야기의 줄거리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길을 따르기 위해 우리가 눈을 뜰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회복을 위한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참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묵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앞 선 이야기에서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님께 "선생님이 영광스럽게 되실 때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혀 주십시오." 라고 높은 한자리를 청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러한 요한을 못 마땅히 여기는 다른 제자들의 태도로 보아, 아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크게되고자 하는 사람",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 "모든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 후편으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이야기됩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 겉옷과 빨마가지를 벗어 깔며 "호산나! 주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축복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이제 오나니 복되도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호하여 맞고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들이 곧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 할 것입니다. 수난의 날이 오고 십자가 처형이 있을 것입니다. 이 것이 우리의 예리고 소경 이야기에 이어질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먼저 우리는 몇 가지 의문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다. 1.예수님께서는 왜 소경의 첫번째 외침에 응하지 않으시고 세번의 외침이 있은 후에야 소경을 부르라 하셨을까? 2.그리고 또 왜 예수님께서는 직접 소경을 부르시지 않고 군중에게 그를 부르라고 하셨을까? 3.그 부르심에 왜 소경은 그냥 달려가지 겉 옷을 내어 던지고 갔을까? 4.왜 예수님은 소경에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물으셨을까? 예수님께서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셨을까? 지금까지 이 성서 구절을 읽으면서 이러한 의문을 가져 보셨는지요? 이러한 의문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 이야기에 새롭게 다가갈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로 하여금 궁금하게 하는 이러한 점들이 바로 우리에게 사건의 정보 차원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무엇인가를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의문의 대답들을 우리의 정밀 독서를 통해 알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한 단락씩 관찰하면서 읽어 볼까요?
<< 일행은 예리고로 갔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함께 예리고에서 다시 떠날 때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걸인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 길과 길을가기(전진) / 정지된 동작 (전진의 대열에서 제외 또는 소외된 자) : 다른 모든이가 움직이고 있는데 비해 바르티매오라는 소경 걸인만이 길 위에 정지되어 제외되어 있습니다. 그는 무리에서 제외된 사람 곧 소외된 사람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말을 듣고 외치기 시작했다: "다윗의 아들 예수님,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 크게 외쳤다: "다윗의 아드님, 불쌍히 여기소서!">>
소경의 태도와 외친 말들을 잘 관찰해 봐야겠습니다. 바르티매오와 예수님에 대한 호칭을 한 번 비교해 보십시요.
-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걸인 / 다윗의 아들 예수님: 바르티매오가 어떤 특별한 타이틀이 없는 한 개인 티매오의 아들이라면 예수는 "다윗의 아들" 즉 왕손으로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지체 높으신 어른이 됩니다.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는 동냥을 구걸하는 "걸인"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는 소경이지만 앉은뱅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전형적인 걸인이 그러하듯이 길가에 앉아서 자비를 구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아들 예수님,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아드님 불쌍히 여기소서"는 "나으리 불쌍히 여기시어 한푼 적선합쇼"와 거리 멀지 않은 표현일 것입니다. 이는 남의 관심과 동정을 끌고자 하는 전형적인 한 "구걸자 걸인"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 고백한 것은 구세주로서의 진정한 예수님을 고백한 것이라기 보다, 비천하고 비참한 자신의 처지에로 능력있고 지체 높으신 예수의 관심과 동정심을 끌고자 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를 부르시오", "무엇을 바랍니까?(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랍니까?)"
소경의 청을 들어주는데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서 있는 자와 앉은자의 관계, 이를테면 어떤 신분적 상하의 관계 속에서 거지에게 동냥 한 푼 던져주듯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소경을 먼저 예수께로 불러오게 하고, 그리고는 그가 원하는 것을 분명히 말하게 합니다.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가?" ("무엇을 바랍니까" 대신 우리는 앞의 번역을 취하기로 하겠습니다.) 이것은 그의 구체적 욕망에 대한 질문입니다. 내 자신의 욕망이나 의지대로가 아니라 상대의 욕망을 존중하여, 거지라는 신분에 갖혀 "나으리 자선을 베푸십시오" 라고 밖에 할 줄 모르던 그를 자신의 고유한 욕망을 가진 한 인간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은 바로 대화에로의 초대가 아니겠습니까? 이는 구걸하는 사람과 구걸에 상응하는 어떤 것을 던져주는 사람과의 객관적이고 일방통행적인 관계가 아니라, 이 소경 거지를 한사람의 욕망주체로, 대담자의 자격으로 대하는 상호적인 관계수립에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이 것은 바로 인격대 인격의 만남 즉 한 인간 대 한 인간의 만남에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예수는 이 소경거지를 소외시키려던 군중을 시켜 그를 부르게 함으로써 그 무리와의 유대관계에로 귀속시키시고 (방해자이던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의 개입으로 이 소경을 격려하는 동맹자로 변신하는 모습을 상기해 보십시요), 이어서 모든이가 가고 있는 전진의 대열에로 불러들입니다. 이렇게 하신 다음, 예수는 질문함으로써 이 소경을 단순한 구걸자의 위치에서 한 사람의 대등한 인간적 주체로 위치를 승격시키십니다. 이것은 타인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거지로서의 상태에 그 스스로 자신을 묶어두고 소외시키고 있는 이 소경을 먼저 그 인습과 타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작업입니다.
처음에 군중은 그의 외침을 저지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 소경에게서 그들과 섞일 수 없는 거지의 신분 밖에는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들은 겉모습 밖에 볼 줄 모르는 내적 눈이 어두운 자들입니다. 이들로 하여금 소경을 부르게 한 뜻은 그들이 못보는 것을 보게 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소경거지 역시 예수님과 함께 가는 그들의 대열에 함께할 수 있고 또 그들이 소외되어 있는 자를 예수께로 인도해야 한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하심은 아닐런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소경에게서 다른 것을 보십니다. 즉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거지의 상태에 묶여있는 해방되어야 할 한 인간을 보신 것입니다. 우리의 소경 거지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소서" 라고 한 때는 바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던 순간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그는 예수님과 마주하여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표현하는 한 대담자적 파트너로서 변모됩니다. 거지 소경아래 억눌려 있던 인간 회복이 실현된 것입니다.
"선생님 보게해주십시오"-"가시오, 그대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읍니다"-"곧 보게되었고 예수를 따라 길을 나섰다" (51-52절).
소경이 "보게 해달라"고 했는데 예수께서는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십니다. 보는 것과 구원의 문제가 연결됩니다. "보는 것"과 "구원 되는 것"은 어떠한 관련을 갖는지? 그리고 이 보는 것은 예수의 길을 따라 나서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자 즉시 그는 보게되었고 예수를 따라 길을 나섰다"(52절). 그렇다면, 이 "구원"은 예수의 길과 관련되는 어떤 것이며, 이 "눈뜸" 역시 예수의 길과 관련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실까요? 믿음이란 자신의 무능에 대한 인정의 고백이지요? 너의 믿음이라 함은 곧 고백된 너의 무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내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과 버금가는 유일한 힘은 바로 너의 무능에 대한 너의 인정과 고백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너를 구했다"는 것은 곧 "너의 무능력의 고백이 너를 구했다"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그 것은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그 자부심이 아니라 스스로 인정하는 너의 무능력이 너를 구원했다"는 것을 말한다 할 것입니다.
"가라" 라고 하는 명령은 이제 구원의 길에 들어선 자에 대한 하나의 출발 명령과도 같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제 군중에 관한 대목들을 읽고 묵상해 볼까요?
군중: 중개자 (48-49) << 많은 사람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으나..." - "그를 부르시오" - "힘내시오, 일어나시오. 그 분이 부르십니다" >>
군중은 예수께로 향한 소경의 외침을 막습니다. 군중은 소경과 예수 사이를 가로막는 방해꾼 즉 하나의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르티매오에게 소리를 못지르게 한 군중을 역으로 그들에게 바르티매오를 부르라고 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과 바르티매오가 서로 만나는데 장애가 되었던 군중을 자신의 말씀을 바르티매오에게 전하는 중개자로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소경을 부르며 조금전의 방해꾼적인 태도와는 달리 그를 격려하는 한 동맹자의 태도를 취합니다: "힘내시오, 일어나시오. 그 분이 부르십니다"(49절). 군중은 이렇게 성서 텍스트 곳곳에서 수시로 변하는 자들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동맹자인 만큼 방해자도 될 수 있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군중들을 방해자에서 동맹자로 바꾼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효과 즉 말씀의 힘이었습니다. *(군중이란 바로 우리가 처하고 있는 한계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극복해야할 하나의 한계인 것이지요.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그 분의 말씀의 개입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생각 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리고 라는 공간이 그것입니다.
공간:예리고 예리고는 구약에서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는데 함락해야할 하나의 성이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함께하여 함락한 성이지요(cf. 여호수아 6절). 여기서 예리고는 "장애물"이라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정복해야할 하나의 "장애물". 이 "장애물"이란 형상은 군중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군중의 저지는 맹인이 예수님과 만나기 위해 먼저 정복해야할 장애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눈이 안보인다는 것은 또한 봐야할 것을 못보게하는 장애조건이지요. 맹인이 예수님이 따라 길을 나선 것은 이 장애조건이 거두어진 후였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 이야기에서 보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길을 가는데 있어 장애가 되는 어떤 것을 상징합니다.]
분석의 총정리 우리의 분석에 의하면 이 예리고의 소경 이야기의 관심은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소경의 치유 이야기에 있다기 보다, 예수의 일행이 가던 길에서 제외되어 있던 바르티매오가 어떻게 예수가 가는 길 속에 합류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따라 나서는 대상은 제자들도 아니며 많은 군중들도 아니며, 예수님입니다. 그의 목적은 분명하며,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은 분명합니다. [이 소경의 이야기가 다른 소경들 치유 이야기와 다른 점은 예수께서 이 소경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말리지 않는 듯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경우에서는 치유된 소경을 돌려보냅니다. 이 사실은 이 소경 이야기를 예수님과 제자와 관계되는 어떤 한 문제와 관련시켜 보아야 함을 더욱 뒷받침해 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이야기의 전후 맥락과 이 문제를 연관시키면서 우리의 독서를 마감하기로 하겠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예수님께 대한 특별 청탁이 있은후,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들에게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는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도 모르면서 자리다툼이나 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눈먼 소경과 같지 않습니까? 이러한 제자들이 곧 예리고 입성에서 군중들이 보여줄 예수님에 대한 환영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었을까요?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축복받으소서"라고 외치던 그 군중은 멀지않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다시 외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수난은 시작될 것이고 제자들을 떠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실상을 볼 수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맥락안에서 이 예리고의 맹인 치유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예리고의 소경이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믿음으로 인해 눈을 떴듯이, 제자들도 예수를 따르려면 눈부터 떠야하는 것입니다. 이 것은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자신들에게 눈뜰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면의 눈, 자신의 무능을 볼 줄 아는 눈, 우리에게서 제외된자, 소외된 자를 볼 줄 아는 눈, 내가 소외시키는 자는 없는지를 볼 줄아는 눈. 세상적인 욕심에서 예수님의 길을 바로 볼 수 있는 눈 (우리의 소경이 숱한 다른 것 재물 등을 원한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원했다는 것은 상징적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의 실상과 허상을 볼 수 있는 눈...
기도: 이지희
볼 수 있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있는 나는 진정 눈 먼 사람입니다
타성에 젖어버린 허상의 눈 눈물 사이로 당신의 별만 반짝입니다
그 분을 따르고 싶은데 , 헛된 욕망에서 진실을 캐낼 수 있는 내면의 눈 영혼의 눈
어찌 아득한 밤처럼 깜깜하기만 합니까? 청합니다 , 청합니다
볼 수 있는 것을 실로 보는 참 기쁨을 눈 먼 소경의 마음이 되어 누릴 수 있기를
함께 끝가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서를 마치면서 처음 의문 사항 중 세번째 것인 "왜 소경은 겉 옷을 내어던지고 달려갔을까?"에 대한 묵상은 독자 여러분에게 남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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