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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난 헤로데가 아닌가?(QT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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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이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0-09-29 조회수1,719 추천수8 반대(0) 신고

<말씀>루가 9,7-9

 

그 때에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는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어리둥절해졌다.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고 또 옛 예언자 중의 하나가 되살아났다고 하는 말도 들려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베어 죽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소문에 들리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하면서 예수를 한 번 만나 보려고 하였다.

 

<묵상> -불안에 싸인 헤로데-

 

오늘 복음은 헤로데의 불안하고 두려운 심경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헤로데의 불안에 관해 공관복음의 세 저자가(요한복음만 빼고) 모두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헤로데가 요한을 죽인 일로 엄청나게 사회가 들썩거리고 그 파장이 요란했던 것 같다.)

 

헤로데의 불안은 근본적으로 예수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데에 있다.

한창 예수라는 청년은 온 유대지방을 떠들썩하게 하고, 수많은 무리가 그를 따라다니어  왕인 헤로데의 귀에까지 소문이 들어갔는데(마르코6,14), 헤로데는 예수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헤로데 뿐 아니었다. 대다수의 민중들은 예수를 선지자 중 하나이거나 기적을 행하는 능력으로 보아 구약 최대의 예언자인 엘리야의 환생으로 여기기도 했다. 이 모두가 예수님의 일면 만이 확대 해석되었을 뿐이다.

사람은 상대방에 대해 불편하고 불안할 수록 그를 신속하게 규정지어 버리려는 심리가 있다.

그 단적인 예가 헤로데에게서 드러난다. 헤로데는 즉흥적으로 예수님을 요한이라 단정해버렸다(마르코6,16). 이는 요한을 죽인 그의 죄의식, 죄책감을 극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우리도 무슨 나쁜 일이 벌어지거나 미사를 궐한 주일에 교통 범칙금이라도 물게 되면 하느님이 내리신 벌이라고 나의 죄책감을 투사한다. 나의 어떠어떠한 죄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라는 사고가 만연한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하느님은, 예수님은 그런 분이실까?

 

수많은 사람들이 이천년 가까운 역사 속에서 예수를 믿어왔고, 내 신앙의 주인으로 고백하였으며, 그를 위해 피 흘리며 죽어갔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도 전 세계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그 분을 따라 살고있다.

그러나 예수가 누구신지 제대로 모르면 그건 나와 아무 상관없는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 현상의 하나이다.

그 분이 누구신지 내가 알지 못하면 예수 자체가 나의 불안의 근원이 될 뿐이다.

 

난 혹시 헤로데가 아닌가?

나는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 바로 알고 있는가?

혹시,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건 한 눈 질끈 감고 봐주는 줏대없는 노인이거나, 잘못은 무조건 엄벌에 처하는 완고한 대상으로만 인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말로 내가 뚫고 나갈 수 없는 철벽 안에 갇혀있다고 느껴질 때, 내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을 때, 괴로움으로 숨쉬기조차 곤란할 때 그 분은 내 곁에 살아계신 분인가.

살아계시다면 뭐라고 말씀하시는 분인가.

 

오늘 헤로데의 불안을 접하면서 난 과연 예수님을 누구라고 알고있는지, 혹 그분이

내 불안의 대상은 아닌지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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