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오늘도 무사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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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민철 | 작성일2000-10-02 | 조회수2,642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글라라는 이제 초등학교 1학년 꼬마애로, 나의 사촌이기도 합니다. 내가 찾아갈 때마다 수줍게 웃으며 인사하고, 곁에서 이것저것 쫑알거리는 모습이 여간 귀엽지가 않습니다. 글라라는 여느 아이들처럼 포켓몬스터를 좋아하는데, 그 이름들이 하도 재미있고, 기발해 내가 껄껄 웃을라치면, 녀석은 "웃음소리가 왜 그래요?"라며 같이 재미있어 합니다. 이렇게 웃는 사람들 아직 못 봤나 봅니다.
어제는 같이 산을 오르는데, 나더러 대뜸 하는 말이, ’왜 다시 군대에 안 가느냐’는 겁니다. (그런 끔찍한 소리를...^^;) 보아하니 내 짧은 머리를 보고, 내가 아직 군인이며, 지금은 좀 긴 휴가중이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아직 말투가 군바리 특유의 그것이 남아 있고, 제대 직전에 후임병 녀석이 워낙 머리를 짧게 잘라 놔서리, 지금도 전투복만 입혀 놓으면 영락없는 군인일 겁니다.) 내가, 나는 제대했고, 이제는 다시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설명을 해줘도 ’왜 다시 안 들어가냐’며 의아해 합니다. 아마 ’한번 군바리는 영원한 군바리’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제대한 지가 3주가 다 되어 갑니다. 나 스스로는 아주 오래전 일처럼 여겨지는데 아직 3주도 채 지나지 않았다니 이상할 따름입니다. 군기도 빠질대로 빠져가지고 이젠 6시 기상도 힘들게만 느껴집니다. 전에는 병장때도 다름 후임병들보다 먼저 일어나 깨우곤 했었는데 말입니다.
문득, 어제 본당 신부님께서 강론 중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신부님은, 자기가 지금껏 살아 오면서 가장 말을 잘 들었을 때가 7사단 신병교육대 훈련병 시절이었던 것 같다고 하셨는데, 6사단 신교대에서 근무했던 저로서는 무척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말을 잘 들어야죠, 살아야 하니까...^^;) 그땐 참 부지런 했었는데... 그런데...이제 채 3주도 지나지 않았는데 잊어가고 있습니다. 그 시절들을...
그것이 의도적인 망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곳 생활이 제게 주었던 교훈들, 함께 힘들어 했고, 지금도 여전히 고된 생활을 하고 있을 전우들까지 기억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니, 새삼 저라는 인간의 간사함에 고소할 뿐입니다. 참으로 새삼스럽게.
제대하던 그날까지도 매일 기상시 마다 바치던 기도가 있었습니다.
"오늘도 무사히"
흔히들 말하는 ’군생활을 잘 했다’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던 저로서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것 조차가 고역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한밤중에 다시 눈을 뜨게 되는 것은 제일 행복했습니다. 아직 한번도 ’잠이 드는’ 행보감을 맞볼 수가 있으니까요) 신해철의 노래가사마냥, ’잠들때 마다 내일 아침에 깨지 않기를 기도했지~’까지는 아니었어도, 천체운동에 갑자기 변화가 생겨 내일 아침에 해가 뜨지 아니하고 영원히 밤이 계속된다면, 잠을 더 잘 수도 있어 좋겠다라는 생각도 사실 종종 했더랬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저였지만, 그래도 기도 - 차라리 구걸이었던 - 할 수 있는 힘이나마 있어서, 저는 말그대로 ’이를 악물고’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짬밥’을 먹어가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보초근무중에도 k-2 소총 좌우총열덮개의 10개홈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묵주기도를 바치곤 했지만, 이 ’아침기상기도(?)’만큼 간절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말주변도 없고, 글발도 미미한 저였던 지라, 거창한 기도는 도시 생각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떠올린 것이 "오늘도 무사히", 가끔 버스운전사님 옆 창에 걸려 흔들거리는 것을 누구나 본 적이 있을, 바로 그 문구였습니다.
2000년 9월 12일 드디어... 끝내, 김병장은 제대를 했고, 전역 3주째를 맞고 있습니다. 그 새 많은 것들을 잊었고, 또 그 사실조차 모른채 내 안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 것들이 있을 겁니다. 진지공사때 모래주머니를 제대로 짊어질 수 없어 절망했던 일, 반항하다 나이도 어린 고참한테 구타당한 것이 분해 화장실에서 몰래 흐느끼던 눈물, 그리고 기타 좋았던 기억, 나빴던 기억들...
하지만 이 모든 사건들 가운데, 언제나 주님께서는 불쌍했던 우리의 김병장과 함께 하셨고, 또 힘이 되어 주셨음을 저는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선물하신, 김병장의 가난함과 비참함, 고통과 슬픔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없었던들 저는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 있지도, 이 자리에 있지조차도 못했을 것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앞으로도 그러하긴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군인은 영원한 군인인 것보다도 더 저는 주님의 영원한 종이며, 영원한 이등병입니다. 그리고 또 기도합니다.
"오늘도 무사히"
이 기도를 지금 이순간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흘리시고, 눈물을 삼키고 계실 모든 대한민국 국군장병들을 위해 바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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